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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의 <차를 마시는 여인>에 등장한 도자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성내동의 다세대 주택 서울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성내동에서도 사오층 다세대 주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원룸이나 투룸이라고 불리는 주택들이다. 주차장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건축법 때문에 대부분 1층은 기둥만 있는 필로티 구조로 지었다. 사십 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건물도 유행을 탄다. 한 지역에 비슷비슷한 건물이 세워지는 이유는 좁은 땅에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건축 관련 법규에서 허용하는 기준을 지키면서 세대 수를 늘리려다 보니 비슷비슷한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다. 최근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이유는 주차 문제 때문이다. 필로티 구조에 만든 주차장은 용적률 제한을 받지 않으며 층으로 계산하지 않아 층 수 제한에서 벗어난다. 주차장 설치를 의무화한 법을 지키면서 주거 .. 더보기
떡볶이-1983년 가을 1983년 10월 13일 오후, 집 앞 떡볶이 가게는 여전히 십대 청소년들로 붐볐다. 이 날 서울에 있는 고등학생들은 아침 일찍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아웅산 테러사건 희생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은 추모행사일 뿐 아니라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 공무원, 관변단체, 회사원까지 총동원한 관제시위이기도 했다. 당시 여의도에 백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정부행사 참가인원은 부풀리고, 반정부행사 참가인원은 줄이는 행태는 그때도 있었으니 진짜 백만 명이 모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래도 아스팔트 광장은 물론 경계로 만든 잔디밭에도 사람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장례식은 오전에 끝났다. 장례식 참석으로 그날 수업은 갈음했다. 오후는 수업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더보기
1984년 8월의 마지막 날 1984년 8월의 마지막 날, 장대비가 쏟아졌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우산은 쓰나마나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쫄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인 토요일 등굣길(주육일 근무제였던 당시는 학교도토요일 오전에 수업을 했다)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성내동과 방이동을 가르는 성내천의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거센 황톳물은 성내천의 흙벽을 무너뜨리며 한강으로 흘러갔다. 이때만 해도 비가 쉬지 않고 닷새 동안 퍼부을 줄 몰랐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만 해도 성내천 주위의 밭들은 물에 잠겼어도 나란히 있는 2차선 도로까지 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닷새 동안 중부지방에 내린 비로 한강의 모든 댐들이 수문을 열자 한강의 수위는 조절불능 상태에 빠졌다. 한강물이 불어나면서 범람 .. 더보기
70여년 이산의 세월을 담은 <결정적 순간> 한 장 '늙은 어머니를 만난 늙은 아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지만 마음 깊은 곳부터 흐르는 눈물까지는 막을 수 없었나 보다.' 전쟁, 분단, 증오, 화해, 가족, 이별, 그리움, 원망, 만남, 미안함... 이산의 아픔을 표현하는 어떤 말보다 이 사진은 이산의 본질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산가족 만남행사가 남과북의 정치적 대립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성도 알리고 있다. , 이산가족 만남행사의 본질을 한 컷의 사진에 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결정적 순간'을 담기 위한 사진기자는 항상 호랑이의 눈을 번뜩인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여러 가족들이 만나고 있는 넓은 공간에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 '이 장면이야'하고 판단하기 전까지 한쪽 눈을 찡그릴 수 없다. '왔다'라고 생각한 순간, 한쪽 눈.. 더보기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서 큰 산이 작은 산을 품고, 작은 산이 더 작은 산을 보듬었다. 산과 산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무와 풀이 의지한다.고대 서라벌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삶터에 산을 만들고 조상을 모셨다. 고인이 잠든 산의 등성이는 먼 발치로 보는 산의 등성이와 겹치며 신령한 산의 기운을 전했다. 산자는 삶터에서 조상의 묘를 통해 신성함을 간직한 자연과 연결되었다. 하늘에 닿아있는 먼 산은 신이 있는 곳, 가까운 산은 조상이 머무는 곳, 평지는 자신이 있는 곳. 경주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이 지배층을 사로잡기 이전까지 고대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조상을 모셨다. 유가처럼 삼년의 상례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묘를 마을 근처에 만들었다. 망자의 무덤은 후손의 힘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 더보기
[청명상하도] 다리에서 만난 문신과 무장 “물렀거라! 물렀거라!”가마 길잡이가 손을 휘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렀거라! 물렀거라!”반대편 길잡이도 이에 질세라 두 팔을 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마를 이끄는 길잡이와 말 탄 무장들을 이끄는 길잡이 모두 비켜 설 기미가 없다. 말을 타고 다리에 진입한 무장들의 기세에 강물을 구경하던 사람이 깜짝 놀란다. 첫 번째 말에 탄 무장은몸을 돌려 자기를 보는 사람에게 손을 들어 무언가 말을 한다. 듣는 사람의 표정을 보니 그리 좋은 말을 하지 않는 듯하다. 고삐를 잡아채는 두 번째 말을 탄 무장의 모습을 보니 이들은 말에서 내릴 생각이 없나 보다. 상대편 문신이 타고 온 가마도 길가로 비켜서지 않을 듯하다. 이 모습은 북송의 한림학사였던 장택단이 에 담은 장면이다. 문신 중심의 문치주의를 통치 원칙으로.. 더보기
송(宋)의 문치주의와 사대부 우리는 송나라를 도덕적 수양과 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는 주자학의 나라로만 생각한다. 아마도 주자학을 학문의 모태로 삼은 조선의 성리학자들 때문일 것이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신분에 맞는 질서를 강조했던 나라이다. 이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조선 사대부들이 숭앙했던 송나라도 그랬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와 율곡은 물론 그 후계자들은 송나라의 사상과 문화 중 일부만을 수용하였다. 그렇지만 주자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송나라를 성리학의 나라로만 인식하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남송 시기 정립된 신유학인 주자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전용(專用)하였다. 그들은 주희의 사상만 수용하지 않았다. 주희의 모든 면을 닮으려 했다. 주희의 시를 따라한 퇴계와 율곡의 연작시도 이런 배경에서 출현했다. .. 더보기
장인(匠人)에 대한 짧은 생각 장인이란,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하는 사람. 전문가를 일만 시간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계발 방식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미국식 비즈니스의 느낌이 강한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접근법은 전문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일만 시간동안 같은 일만 하면 생활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시간을 한 가지 일(직업)에만 전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라도 강진의 칠량마을은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생계수단은 옹기였다. 그런데 우리의 주거방식이 아파트로 바뀌고, 발효음식도 사다 먹게 되면서 옹기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줄었다. 생활이.. 더보기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보면서 든 생각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불가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최고의 덕목은 모든 중생이 수행을 통해 자신은 물론 타인도 구원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미타불이든, 약사여래이든······. 그런데 조계종의 속승들은 중생의 염원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속만 챙기고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요인 중의 하나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이다. 사제만이 신과 접견할 수 있고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신(神) 팔이'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독점적 지위 때문에 가능했다.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세속의 정치권력과 타협했지만 적어도 종교개혁은 교회와 사제만이 대리하던 신성의 영역을 혁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절밥을 먹고 승려가 된 비구들 중에는 자기들이 세상의 진리를 다 아는 척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