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버마 민중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다.
풀무더기
2007. 10. 2. 17:31
지난 8월부터 시작된 버마 민중의 민주화 시위는 9월 중순 버마의 정신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시위 대열에 나서면서 버마 민중의 대다수가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1988년의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이다. 현재 군사정권의 무력진압으로 인하여 수십명이 사망(군사정권은 9월 29일 현재 1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추정수치가 맞을 것이다. 독재국가치고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는 적이 있던가.
그런데 버마의 민주화 시위 역사를 살펴 보니,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의 역사와 너무나 유사하다. 그래서 너무 불편하다. TV화면에 등장하는 버마군의 모습을 보는 순간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 서있던 공수부대가 오버랩된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대형으로 펼쳐진 모습이나, 군용트럭에서 내려 시위대를 쫒아가는 모습 등등. 1980년의 한국군부가 자국인들에게 자행한 폭력의 형상들이 버마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현상 이외에도 두 나라의 독재자의 역정과 통치 방식도 유사하다. 62년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네윈이 일본군 준군사조직에서 일했고. 61년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제3세계 국가의 부정한 권력의 시원(始原)이 제국주의 질서에 있음을 버마와 한국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폭력적 통치방식을 내재화한 제3세계 신생독립국가의 지배자들은 자국인들을 제국이 식민을 통치한 방식보다 더 악랄한 방식으로 통제했다. 후천적으로 학습한 폭압의 방식은 자민족, 자국인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교육을 받은 자들이 독립된 국가의 지배자가 되는 순간, 그들의 제국주의적 의식은 생활의 전 영역에서 강제화된다.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국가에 의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국민들의 인권유린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서 하위 구성원 역할을 수행했던 이들이야말로 식민지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현실에서 행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폭력이 자신들의 내재적 규율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학교를 통해 내면화됨으로써 피지배자인 우리도 폭력에 길들여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교, 군대, 직장에서의 상사에 대한 복종 등등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버마로 돌아가 보자. 버마 독립의 아버지라 불려지는 아웅산 장군은 독립운동가였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버마의 정치제도는 의회제도를 근간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된 민주화가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해야 한다. 우리도 제1공화국 시기를 민주화가 실현된 사회로 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런데 1962년 네윈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군정을 실시한다. 군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국가의 운영을 군인들이 장악하고, 국가의 통치를 군대식으로 하는 것이다. 명령과 복종이 우선되는 군대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사회에 군정적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자국민들은 명령의 수행자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가 학교 시절 지겹게 들었던 국민의 의무 수행은 이러한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다는 주권재민의 국가에서 국민의 권리가 군정국가에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구조적 결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 성공으로 박정희에 의한 18년의 군정, 전두환 노태우의 12년 군정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들이 왜 제3세계 국가에서만 발생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논외로 한다. 우리는 이미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서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버마는 1988년 네윈의 26년간의 군정을 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버마 독립영웅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가 주도한 민주화 시위에 의하여 독재자 네윈은 사퇴했으나, 1989년 군부의 쿠데타로 인하여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에 연금되고,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지도자들은 구금된다. 1990년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버마 군부는 총선을 실시하지만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이 82%의 지지율을 획득한 것에 놀라 총선을 무효화하고 폭압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이후 버마의 민주화 세력은 지하로 숨거나, 해외에 망명하여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는 버마에 연금되어 있는 아웅산 수지가 있다. 아웅산 수지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버마의 민주화를 이끌고 있지만, 그가 만약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도 버마인들의 열망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경우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민주화 지도자로서의 평가와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상반되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의 민주화 열망이 한 곳으로 모이는 상징의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콘이다. 아웅산 수지는 영국인 남편이 사망했음에도 영국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연금에서는 풀려날 수 있겠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버마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버마의 민중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은 퇴색해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군부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었던 김대중의 귀국과 연금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생각한다.
우리와 다르게 버마에서의 아웅산 수지에 대한 민중의 존경심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영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난한 자신의 조국에서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라는 정치적 후광이 있지만, 한나라당 박양처럼 아버지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활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영국에 유학, 졸업한 후 영국에서 생활하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에 귀국했다가 버마의 비민주적 현실을 목격하고 버마의 민주화 투쟁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버마 민중은 그녀의 이러한 점을 존경한다.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버마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오늘도 고난의 길을 가고 있기에 버마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우리의 민주화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다. 물론 아직 버마가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신선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이들이 민주화가 이뤄져서 집권하게 되면 변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버마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화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변질 문제는 추후의 문제이다. 우선은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타협은 이루어지면 안된다. 버마에 이권을 갖고 있는 국가들은 어떠한 식으로든 군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을 시도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국 자본의 안전과 이익뿐이다. 유엔도 민중의 혁명ㅗ다는 적당한 타협을 바랄 것이다.
우리 정부가 버마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속내(천연가스개발 같은 경제적 이익은 표면에 불과할 것이다)는 잘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로 힘썼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만큼은 버마의 민주화시위에 대해 민주세력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노무현은 인간 노무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다. 적어도 우리는 폭압적인 유신정권과 그의 연장이었던 전두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끝냈던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우리와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걷고 있는 버마 민중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지지가 필요한 이유는 앞에서 거론했다. 버마의 민주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지배의 잔영을 쓸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한 국가의 자주와 민주는 이뤄질 수 없다. 우리 또한 이 과정을 완전하게 이룬 것은 아니다. 다만 버마보다는 앞서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 관여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피눈물 속에서 우리의 과거 기억이 떠올려지는 것은 왜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밖에는 없다. 글쓰는 것이 무슨 힘쓰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의 20대 삶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버마 민중들도 8888의 아픔을 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 직업이 글쓰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글을 쓰고 공개한다는 것은 심약한 내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분들의 죽음을 같이 슬퍼하며 그들의 민주화 정신에 공감하고 함께 합니다.
부기 : 이번에 버마 군부의 총탄에 희생된 나가이 겐지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1980년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신군부의 만행을 취재해 전세계에 알렸던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생각나더군요. 저는 그가 있었기에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자국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살인자들의 모습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가진 기자의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역사의 진실에 보다 가깝데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겐지 기자의 기자 정신을 기립니다.
시위에 나선 스님들(Mizzima News에서 퍼옴)
2007년 9월 버마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정렬한 군병력((Mizzima News에서 퍼옴))
그런데 버마의 민주화 시위 역사를 살펴 보니,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의 역사와 너무나 유사하다. 그래서 너무 불편하다. TV화면에 등장하는 버마군의 모습을 보는 순간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 서있던 공수부대가 오버랩된다.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한 대형으로 펼쳐진 모습이나, 군용트럭에서 내려 시위대를 쫒아가는 모습 등등. 1980년의 한국군부가 자국인들에게 자행한 폭력의 형상들이 버마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는 공수부대
이런 역사적 현상 이외에도 두 나라의 독재자의 역정과 통치 방식도 유사하다. 62년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네윈이 일본군 준군사조직에서 일했고. 61년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제3세계 국가의 부정한 권력의 시원(始原)이 제국주의 질서에 있음을 버마와 한국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폭력적 통치방식을 내재화한 제3세계 신생독립국가의 지배자들은 자국인들을 제국이 식민을 통치한 방식보다 더 악랄한 방식으로 통제했다. 후천적으로 학습한 폭압의 방식은 자민족, 자국인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교육을 받은 자들이 독립된 국가의 지배자가 되는 순간, 그들의 제국주의적 의식은 생활의 전 영역에서 강제화된다.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국가에 의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국민들의 인권유린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서 하위 구성원 역할을 수행했던 이들이야말로 식민지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현실에서 행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폭력이 자신들의 내재적 규율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학교를 통해 내면화됨으로써 피지배자인 우리도 폭력에 길들여지게 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교, 군대, 직장에서의 상사에 대한 복종 등등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버마로 돌아가 보자. 버마 독립의 아버지라 불려지는 아웅산 장군은 독립운동가였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버마의 정치제도는 의회제도를 근간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된 민주화가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해야 한다. 우리도 제1공화국 시기를 민주화가 실현된 사회로 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런데 1962년 네윈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군정을 실시한다. 군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국가의 운영을 군인들이 장악하고, 국가의 통치를 군대식으로 하는 것이다. 명령과 복종이 우선되는 군대에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사회에 군정적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자국민들은 명령의 수행자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가 학교 시절 지겹게 들었던 국민의 의무 수행은 이러한 과정의 일환일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다는 주권재민의 국가에서 국민의 권리가 군정국가에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구조적 결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 성공으로 박정희에 의한 18년의 군정, 전두환 노태우의 12년 군정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들이 왜 제3세계 국가에서만 발생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논외로 한다. 우리는 이미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서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버마는 1988년 네윈의 26년간의 군정을 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버마 독립영웅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가 주도한 민주화 시위에 의하여 독재자 네윈은 사퇴했으나, 1989년 군부의 쿠데타로 인하여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에 연금되고,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지도자들은 구금된다. 1990년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버마 군부는 총선을 실시하지만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이 82%의 지지율을 획득한 것에 놀라 총선을 무효화하고 폭압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이후 버마의 민주화 세력은 지하로 숨거나, 해외에 망명하여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는 버마에 연금되어 있는 아웅산 수지가 있다. 아웅산 수지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버마의 민주화를 이끌고 있지만, 그가 만약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도 버마인들의 열망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경우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민주화 지도자로서의 평가와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상반되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의 민주화 열망이 한 곳으로 모이는 상징의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콘이다. 아웅산 수지는 영국인 남편이 사망했음에도 영국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연금에서는 풀려날 수 있겠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버마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버마의 민중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은 퇴색해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군부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었던 김대중의 귀국과 연금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 생각한다.
우리와 다르게 버마에서의 아웅산 수지에 대한 민중의 존경심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영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난한 자신의 조국에서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라는 정치적 후광이 있지만, 한나라당 박양처럼 아버지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활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영국에 유학, 졸업한 후 영국에서 생활하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에 귀국했다가 버마의 비민주적 현실을 목격하고 버마의 민주화 투쟁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버마 민중은 그녀의 이러한 점을 존경한다.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버마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오늘도 고난의 길을 가고 있기에 버마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우리의 민주화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다. 물론 아직 버마가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신선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이들이 민주화가 이뤄져서 집권하게 되면 변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버마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화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변질 문제는 추후의 문제이다. 우선은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타협은 이루어지면 안된다. 버마에 이권을 갖고 있는 국가들은 어떠한 식으로든 군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을 시도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국 자본의 안전과 이익뿐이다. 유엔도 민중의 혁명ㅗ다는 적당한 타협을 바랄 것이다.
우리 정부가 버마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속내(천연가스개발 같은 경제적 이익은 표면에 불과할 것이다)는 잘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로 힘썼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만큼은 버마의 민주화시위에 대해 민주세력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노무현은 인간 노무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다. 적어도 우리는 폭압적인 유신정권과 그의 연장이었던 전두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끝냈던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우리와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걷고 있는 버마 민중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지지가 필요한 이유는 앞에서 거론했다. 버마의 민주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지배의 잔영을 쓸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한 국가의 자주와 민주는 이뤄질 수 없다. 우리 또한 이 과정을 완전하게 이룬 것은 아니다. 다만 버마보다는 앞서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다.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 관여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피눈물 속에서 우리의 과거 기억이 떠올려지는 것은 왜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밖에는 없다. 글쓰는 것이 무슨 힘쓰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의 20대 삶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버마 민중들도 8888의 아픔을 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 직업이 글쓰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글을 쓰고 공개한다는 것은 심약한 내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분들의 죽음을 같이 슬퍼하며 그들의 민주화 정신에 공감하고 함께 합니다.
부기 : 이번에 버마 군부의 총탄에 희생된 나가이 겐지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1980년 광주에서 목숨을 걸고 신군부의 만행을 취재해 전세계에 알렸던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생각나더군요. 저는 그가 있었기에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자국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살인자들의 모습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가진 기자의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역사의 진실에 보다 가깝데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겐지 기자의 기자 정신을 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