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진

김영승, 반성 187

풀무더기 2009. 11. 3. 15:46

말차, 서울, 2007.


반성 187

김영승

茶道니 酒道니 무릎 꿇고 정신 가다듬고
PT체조 한 뒤에 한 모금씩 꼴깍꼴깍 마신다.
차 한잔 술 한잔을 놓고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나한테 그 무슨 오도방정을 또 떨까
잡념된다.

지겹다.


김영승,『반성』, 1987.

한국에는 도인(道人)들이 너무 많다. 어떤 도인은 텔레비젼에 나와 번쩍이는 머리의 광채를 발산하며 도에 대해 말한다. 그보다 하수인 도인들은 중심에서 밀려나, 종극에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도를 아냐고' 묻는다. 가끔씩 되묻고 싶다. '그러는 당신은 도통()하셨소'라고. 이들 외에도 자기 좋아 마시는 것을 갖고 도작(道作: 도라고 지칭하며 마시기를 포장한다)질을 하는 이들도 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온갖 수사여구를 붙이고, 온갖 품을 들인다. 이는 술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차와 술을 마시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많은 사람들은 차나 술(정말 차나 술 따위를)을 마시면서 도를 닦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당으로 소문나 이백(白)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이 신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취하면 무엇인들 못할까?
 
주량이 작은 나는 술보다는 차를 즐겨 마신다. 적지 않은 시간 차를 마셨지만, 한 번도 도(道)닦는 심정으로 마신 적이 없다. 차는 차맛으로 간혹 술은 술맛으로 마실 뿐이다. 아니면 분위기때문에... 어떤 때는 맛이 없는데도 마셔야 할 때도 있다. 그놈의 비즈니스때문에.....

한국에서 다인(茶人)인 양하는 분들의 수행과정을 보면 도에 통하는 것 같다. 그 명칭도 거창한 다례제에서 다인들이 하는 의식을 보면 이것이 도통하려고 하는 것인지, 겉치레인지 헷갈리게 한다. 차인도 아닌 다인(한국에서 다인들은 자신들을 차인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들은 무릎을 꿇고 차를 바친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우려낸 차가 너무 의례에 치우쳐 정작 중요한 맛을 떨어지뜨리지 않을지 걱정된다. 형식에 치우치다 보면 채워야 할 내용을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도가 진정으로 도통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위선을 버려야 한다. 참선에 들은 스님의 수도정진을 돕기 위해서는 각성제인 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수도도 하기 전부터 차를 챙기고, 몰지각한 스님들은 수백만원 짜리 보이차와 천냥차를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래서는 도(道)를 도(導)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짓들은 석가모니의 삶과도 어긋난다.  

편하게 물 대신에 차를 마신다고 말하자. 물보다는 약간 가미된 맛이 좋아서 차를 마신다고 하자. 무릎꿇고 찻잔을 받지 않고, 편하게 벌컥거리며 마시든, 홀짝거리며 마시든, 그건 차를 마시는 자의 자유이다. 몸이 반응하지 않는데, 도만 앞세우면 그건 도가 아니라 강요된 규율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차나 술따위를 마시면서 도통하고싶지 않다. 그냥 마실 뿐이다. 마시다 보면 맛도 알게 된다. 내 몸이 먼저 알아야 한다. 차를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을 때, 내 주변을 돌아 보며 반성하는 것, 그것이 도에 통하는 길이 아닐까?

김영승의 『반성』연작을 읽다 보면, 정말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반성할 것을 강요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김영승의 시는 허위의 심층을 끄집어 낸다. 그래서 반성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글을 쓰면서 난 반성하고 있나? 이런 글을 쓴 것을 보면 약간의 반성은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뒤돌아 서면 나또한 김영승이 혐오하는 추악한 현대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