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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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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인천 강화, 2008. 3.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1992.


지금의 내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시인이 있었다. 시인은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해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시인은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시「독신자」중에서)"라고 읊었다. 세상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래서 상처받아야 했던 그 시인은 실족과 죽음의 짧은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 내 두 눈을 감기신다(시「독신자」중에서)"처럼 사십 평생의 삶이 상처없이 살아온 것이라고 자위했던 것일까?

어찌 사십 평생을 살아 오면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존재하기에 받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상처에 슬퍼하고, 존재의 이유를 자문했던 시간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할 것이다. 인생을 십년 단위의 주기로 생각하는 것도 새로운 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생전에 자신의 여백을 고민했던 시인은 떠났고, 시인이 여백의 세계로 떠난 나이에 나는 삶의 여백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시인처럼 존재의 소멸이 부재가 아닌 새로운 존재의 탄생임을 인식하지는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