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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김용택, 섬진강 20 섬진강 20 감 傳 김용택 감들이 불쌍했다. 아버님은 초가을부터 행여나 행여나 하시며 거간꾼들을 기다리다 감들이 다 익어가도 팔릴 기미가 없자 큰놈만 대충대충 골라 따도 감은 끝이 없고, 첫서리가 내리고 감들이 사정없이 물러지기 시작하자 밤 터는 긴 장대로 감나무를 두들겨패댔다. 장대를 힘껏힘껏 휘두를 때마다 감들은 후드득 떨어져 박살이 나고 으깨어졌다. 아버님은 이 웬수놈의 감 이 웬수놈의 감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 이 썩을 놈의 감, 하시며 있는 힘을 다하여 두들겼다. 감가지가 찢어지고 감들이 떨어져 물개똥같이 되면 어머님은 이 아깐 것, 이 아깐 것, 하시며 그래도 성한 놈은 광주리에 가득가득 담으셨다. 그러시는 어머님을 보고 아버님은 버럭버럭 화를 내셨지만 어머님은 떨어지는 감을 맞으며 감쪼가리.. 더보기
신경림, 이슬에 대하여 이슬에 대하여 시안(西安)에 가서 도열해 서 있는 수천 기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다 신경림 도열해 서 있는 저 수천 기의 병마용은 만고의 폭군이 자기를 지키는 병사와 말까지도 권력과 영화를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죽였음을 말해준다. 그가 저 병사와 말 들을 시켜 짓밟고 불태운 마을은 얼마며 갈가리 찢고 죽인 백성은 또 얼마이랴. 그런데도 그가 죽인 저 병사들의 자손, 그 병마가 죽인 백성들의 자손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 그 만고의 폭군을 은근히 기린다. 그 덕에 이곳의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게 아니냐면서, 또 그 아니면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진 땅임이 어찌 알려졌겠느냐면서, 짓밟히고 불탄 마을과 들판에 널린 시신이야 한갓 옛날이야기일뿐, 그러니 어찌 탓할 수만 있으랴, 착한 이웃들이.. 더보기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 더보기
김영승, 반성 187 반성 187 김영승 茶道니 酒道니 무릎 꿇고 정신 가다듬고 PT체조 한 뒤에 한 모금씩 꼴깍꼴깍 마신다. 차 한잔 술 한잔을 놓고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나한테 그 무슨 오도방정을 또 떨까 잡념된다. 지겹다. 김영승,『반성』, 1987. 한국에는 도인(道人)들이 너무 많다. 어떤 도인은 텔레비젼에 나와 번쩍이는 머리의 광채를 발산하며 도에 대해 말한다. 그보다 하수인 도인들은 중심에서 밀려나, 종극에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도를 아냐고' 묻는다. 가끔씩 되묻고 싶다. '그러는 당신은 도통(道通)하셨소'라고. 이들 외에도 자기 좋아 마시는 것을 갖고 도작(道作: 도라고 지칭하며 마시기를 포장한다)질을 하는 이들도 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온갖 수사여구를 붙이고, 온갖 품을 들인다. 이는 술도 마찬가지이.. 더보기
이성복, 날마다 상여도 없이 문득, 컴퓨터 속의 이미지 파일을 정리하다 책꽂이에 있는 시집으로 시선이 향했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장 속에 처박힌 시집과 하드디스크 속에 갇혀 호출을 기다리는 이미지의 신세가 같아서였을까? 시를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사진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상을 보면서 동일화된 시선은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 오랜 시간동안 누적된 감성때문일 것이다. 시각적 매체인 사진의 이미지가 시의 울림을 방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시집에 갇힌 시와 컴퓨터 속에 갇힌 사진을 끄집어 내어 연결해 본다. 날마다 상여도 없이 이성복 저놈의 꽃들 또 피었네 먼저 핀 꽃들 지기 시작하네 나는 피는 꽃 안 보려고 해 뜨기 전에 집 나가고, 해 지기 전엔 안 돌아오는데, 나는 죽는 꼴 보기 싫어 개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