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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도봉산] 보문능선에서 헤매다

도봉산 매표소를 지나 갈림길에서 보문능선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겹겹이 다져진 눈길을 오랫만에 걷는다. 지난 일요일에도 적지 않은 눈이 내렸지만, 길 가운데는 차와 등산객들의 발길에 다져져서 단단하다. 올해 처음으로 하는 산행에서 눈 덮인 산길을 걸으니 기분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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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 서울 도봉산, 2011. 1.

언제 봐도 능원사의 금색 단청은 촌스럽다. 게다가 용마루에 얹은 금시조(金翅鳥)는 근원도 없는 짬뽕 미학의 상징이다. 인도신화에서 우주의 수호자 비슈누를 태우고 악령을 퇴치하는 가루다(迦樓羅, 금시조의 원형)의 의미를 살리려고 한 듯 새 위에 부처(아래에서 쳐다 봐서 어떤 부처인지 잘 안 보인다. 이 절이 미륵불을 모신다고 하니 미륵불이겠지)와 화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다. 금시조가 아니라 봉황 또는 수탉처럼 느껴지는 이 새의 날개에는 태극까지 새져져 있다 태극은 고대 중국인이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 본 실체인데 무슨 인연으로 각인되었는지 모르겠다. 용을 발로 누르고 서 있는 새의 모습은 비슈누가 가루다를 타고 사악한 뱀을 잡았다는 신화에서 착안한 것 같은데, 왜 '뱀'이 아니고 '용'이지? 고대 인도와 고대 중국, 불교와 도교 사상이 단순한 도식으로 버무려지면서 이 새는 금시조도 붕(鵬, '莊子'에서 나오는 상상의 '새'로 웅대한 이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도 아닌 수탉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황금빛 번쩍이는 용마루에 철심으로 발목이 묶이는 바람에 날아보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최근 사찰을 지나다 보면 중창 불사 명목으로 화려한 건축물이 세워지고 있는데, 가식적인 모습을 배제했으면 좋겠다.  

능원사, 도봉사를 지나 본격적으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낮과 밤이 바뀐 채 며칠을 허덕거렸더니 벌써 숨이 차온다. 마감이 끝나면 푹 자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더니 혓바늘까지 돋았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열두 시간도 넘게 잤다. 그래도 피로가 안 풀린다. 년초부터 두 주나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유증에, 마감한다고 버벅대고, 밀린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몸을 혹사했나 보다. 영하 15도라는데도 땀은 평소보다 더 많이 나고, 숨쉬기도 가쁘다. 그래도 오랫만에 산에 오르니 기분은 좋다. 멀리 신선대와 자운봉이 푸른 하늘의 맑은 햇빛을 받고 우뚝 서있다. 밝게 빛나는 화강암 암벽이 능원사 황금 단청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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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양이, 서울 도봉산, 2011. 1.

헉헉거리는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친구가 쉬었다 가자 한다. 쉬는 김에 점심도 먹고 가자고 한다. 차가운 김밥을 컵라면에 담갔다 입에 넣었다. 대학 4학년 때 먹던 아침밥이 떠올랐다. 새벽 버스를 타고 학교 도서관에 오다 보니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올 수 없었다. 수업 들어가기 전에 컵라면과 김밥으로 대충 때우고 들어가야만 허기를 참을 수 있었다. 촌음을 아껴가며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도서관에 도착하면 우선 한 숨 자고 일어나기까지 했으면서....아침잠이 많은 나는 수업 들어가기 전 30분 정도는 자야 졸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서둘러 나가는 내가 기특해 보였나 보다. 사실 취업 준비와 먼 책만 읽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이런 방식으로 끼니를 때운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다 산행을 다시 시작하면서부터 컵라면에 길들여졌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투식량을 군대에서만 먹듯이 산에 갈 때는 컵라면을 먹는다. 컵라면을 좋아 하지는 않지만 산에 가면 먹을만 하다.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가. 가끔씩 먹거리를 푸짐하게 싸서 오르는 등산객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부러움은 부러움일 뿐이다. 배낭이 가벼워야 발걸음도 경쾌하게 산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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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암, 서울 도봉산,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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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삼봉, 서울 도봉산, 2011. 1.


추운 날씨에 움크린 자세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데 고양이가 곁에 다가와 웅크리고 앉는다. 오른쪽 눈가에 검은 얼룩과 가는 눈꼬리가 있어서 그런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와 닮았다. 먹을거리를 던져줄거란 기대를 갖고 우리를 쳐다 본다. 친구가 김밥 두 덩어리를 던져 준다. 성에 안 찼는지 여전히 노려본다. 눈매가 매섭다. 다시 한 덩어리를 던져주니 한번에 삼키고 사라진다. 도봉산 야생고양이들은 등산객이 주는 음식으로 살아 간다. 등산객들이 많이 머무는 곳에는 이놈들도 항상 있다. 그래도 이놈들은 도심의 고양이들보다 깨끗하다.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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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더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오봉과 신선대를 거쳐 다락능선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계획을 바꿨다. 밥먹는 동안 내 얼굴을 본 친구는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우이암을 돌아 내려가자는 말에 군말이 없다. 우이암에 올라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본다. 그동안 우중충했던 대기가 바람에 날려갔는지 가을날씨같이 청명하다. 멀리 북한산 삼악이 보인다. 수락산과 불암산도 가깝게 보인다. 푸른 하늘에 그은 한 줄기 획처럼 한 줄기 구름이 청백의 대비를 보여준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라던 서정주의 시가 떠오른다. 시인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좋아했다. 오늘같은 날에 어울리는 시이다.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 해야 한다. 장시간 출장을 갈 때면 제일 먼저 가족을 그리워한다. 아이와 처가 제일 먼저 떠오른게 인지상정이겠지. 지금은 집으로 돌아왔으니 밖에 있을 때만 못하다. 이런 날 누구를 그리워해야 하나?


우이암에 올랐다가 우이동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영통사에 들렸다. 왕벚꽃 나무 나목(裸木)의 밝은 회색빛이 지은지 얼마 안된 범종각 처마색과 대비된다. 지금은 벌거숭이로 서있지만,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버찌 열매를 맺겠지. 나목 아래 쉼터에서 식은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 주먹만한 눈덩이로 두 개의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눈사람이 다칠까봐 조심스럽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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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서울 도봉산,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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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서울 도봉산, 2011. 1.


우이동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무수골로 내려왔다. 산자락 마을의 모습이 서울의 여느 동네와 다르다. 무수골을 지나 도봉역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이제 몇일 뒤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다. 겨우내 나목으로 서있었던 나무는 움추렸던 가지 끝에 꽃과 신록의 잎을 틔우겠지. 이와 함께 잔뜩 움추렸던 올 해 겨울도 지나가겠지. 잔뜩 긴장했던 내 마음도 서서히 풀리면서 싹을 틔워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