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매표소를 지나 갈림길에서 보문능선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겹겹이 다져진 눈길을 오랫만에 걷는다. 지난 일요일에도 적지 않은 눈이 내렸지만, 길 가운데는 차와 등산객들의 발길에 다져져서 단단하다. 올해 처음으로 하는 산행에서 눈 덮인 산길을 걸으니 기분도 좋다. .
신선대, 서울 도봉산, 2011. 1.
능원사, 도봉사를 지나 본격적으로 능선길로 들어섰다. 낮과 밤이 바뀐 채 며칠을 허덕거렸더니 벌써 숨이 차온다. 마감이 끝나면 푹 자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더니 혓바늘까지 돋았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서 열두 시간도 넘게 잤다. 그래도 피로가 안 풀린다. 년초부터 두 주나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유증에, 마감한다고 버벅대고, 밀린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몸을 혹사했나 보다. 영하 15도라는데도 땀은 평소보다 더 많이 나고, 숨쉬기도 가쁘다. 그래도 오랫만에 산에 오르니 기분은 좋다. 멀리 신선대와 자운봉이 푸른 하늘의 맑은 햇빛을 받고 우뚝 서있다. 밝게 빛나는 화강암 암벽이 능원사 황금 단청보다 아름답다.
산고양이, 서울 도봉산, 2011. 1.
우이암, 서울 도봉산, 2011. 1. |
북한산 삼봉, 서울 도봉산, 2011. 1. |
추운 날씨에 움크린 자세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데 고양이가 곁에 다가와 웅크리고 앉는다. 오른쪽 눈가에 검은 얼룩과 가는 눈꼬리가 있어서 그런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고양이와 닮았다. 먹을거리를 던져줄거란 기대를 갖고 우리를 쳐다 본다. 친구가 김밥 두 덩어리를 던져 준다. 성에 안 찼는지 여전히 노려본다. 눈매가 매섭다. 다시 한 덩어리를 던져주니 한번에 삼키고 사라진다. 도봉산 야생고양이들은 등산객이 주는 음식으로 살아 간다. 등산객들이 많이 머무는 곳에는 이놈들도 항상 있다. 그래도 이놈들은 도심의 고양이들보다 깨끗하다.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기 때문이겠지.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더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오봉과 신선대를 거쳐 다락능선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계획을 바꿨다. 밥먹는 동안 내 얼굴을 본 친구는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우이암을 돌아 내려가자는 말에 군말이 없다. 우이암에 올라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 본다. 그동안 우중충했던 대기가 바람에 날려갔는지 가을날씨같이 청명하다. 멀리 북한산 삼악이 보인다. 수락산과 불암산도 가깝게 보인다. 푸른 하늘에 그은 한 줄기 획처럼 한 줄기 구름이 청백의 대비를 보여준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라던 서정주의 시가 떠오른다. 시인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좋아했다. 오늘같은 날에 어울리는 시이다.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 해야 한다. 장시간 출장을 갈 때면 제일 먼저 가족을 그리워한다. 아이와 처가 제일 먼저 떠오른게 인지상정이겠지. 지금은 집으로 돌아왔으니 밖에 있을 때만 못하다. 이런 날 누구를 그리워해야 하나?
우이암에 올랐다가 우이동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영통사에 들렸다. 왕벚꽃 나무 나목(裸木)의 밝은 회색빛이 지은지 얼마 안된 범종각 처마색과 대비된다. 지금은 벌거숭이로 서있지만,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버찌 열매를 맺겠지. 나목 아래 쉼터에서 식은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 주먹만한 눈덩이로 두 개의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눈사람이 다칠까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목, 서울 도봉산, 2011. 1. |
눈사람, 서울 도봉산, 2011. 1. |
우이동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무수골로 내려왔다. 산자락 마을의 모습이 서울의 여느 동네와 다르다. 무수골을 지나 도봉역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이제 몇일 뒤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다. 겨우내 나목으로 서있었던 나무는 움추렸던 가지 끝에 꽃과 신록의 잎을 틔우겠지. 이와 함께 잔뜩 움추렸던 올 해 겨울도 지나가겠지. 잔뜩 긴장했던 내 마음도 서서히 풀리면서 싹을 틔워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