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이의 학습준비물 목록을 보다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장난감이 정규 학습에 편재되어 있는 것에 놀랐다. 오늘날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의 대부분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자연적인 소재로 만든 장난감을 학습대상으로 삼은 교과 내용 편성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장난감이었던 것이 민속놀이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야말로 갖고 놀 장난감이 없었다. 아니 갖고 놀 장난감이 있기는 했다. 나도 동네에서 꽤 소문난 구슬(당시에는 일제 잔재의 언어의식을 극복하지 못해 '다마'라고 했다)치기 대장이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에서 배우는 놀이들 대부분이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아이가 물총 만드는 수업이 있다고 재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길래 마요네즈 병으로 대충 만들어 주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책을 보니 대나무 한 마디를 잘라서 막힌 부분을 뚫어 물구멍을 만드는 물총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대나무였기 때문에 이런 물총을 만드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만들어서 갖고 노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회상과 함께 자연 상태의 것을 활용한 장난감이 학습도구가 된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대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다고 대나무 물총을 갖고 놀았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미 아이들은 전자기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재작년엔가 아이와 함께 인사동에 갔다가 나무로 깍은 팽이를 사주면서 '전통 탑블레이드'라고 했더니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인사동을 돌아다녀 봐도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팽이 가게에 가서 '전통 탑블레이드'를 사달란다.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왜냐고. 아들 놈이 그동안 '탑블레이드' 애니메이션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등등으로부터 뜯어낸 탑블레이드 팽이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감성훈련을 계기가 되지 않은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이틀 만에 무너져 버렸다. 왜냐 하면 아이의 주변 친구들과 시합을 벌여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전통 탑블레이드'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팽이를 감는 감개의 실밥이 풀리면서 팽이를 감아 돌리기가 쉽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의미도 거창하게 이름 붙였던 '전통 탑블레이드'는 아이의 장난감 대기통에 처박혔다. 나의 애뜻한 기대감과 함께. 나는 '전통 탑블레이드'가 다시 부활하지 않을꺼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처는 바로 버리지 않는다. 아이가 혹시라도 다시 갖고 놀지 않을까라고 마법을 걸면서 흥미잃은 장난감을 바로 버리지 않는다. 물론 아이가 사형 대기장으로 간 장난감을 다시 꺼내서 갖고 놀 확률은 5%도 안된다. 불쌍한 장난감은 토이스토리의 운명처럼 에디의 집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집을 떠날텐데 말이다. 어디로 가냐고. 그래도 운이 좋은 놈은 다른 아이의 선택을 받겠지만, 나머지는 어딘가 고장난 채 재활용 쓰레기 통으로 갈 것이다.
요즘 아이는 닌텐도 DS 게임기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했더니 아이도 그냥 사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신이 잘한 일들을 줄줄이 열거한다. 물론 잘못한 일은 절대 입밖으로 뱉지 않는다. '매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 앞에서 오락하지 않았다. 외할머니에게 짜증내지 않았다' 등등의 자신의 잘한 일을 열거한다.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줄줄이 잘한 일을 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엄마 아빠를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게임기 코너에 가서 물건을 다 사고 돌아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앞서 하고 있던 아이가 비켜주기만을 희망하면서 그 작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 본다. 물론 그 옆에는 다른 아이들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 가끔씩은 저렇게 열망하는 아이에게 '닌텐도 DS를 사줄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모으고 있는 용돈이 어느 정도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지켜본다. 아이는 요즘 매주 엄마에게 1000원, 아빠에게 500원을 받는다. 물론 집안일을 도우면 덤으로 몇 백원을 더 주기도 한다.
아이에게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갓난 아기때부터 어른들이 준 돈은 모두 아이의 통장에서 숫자를 불려갔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보관해 주신다고 하고 나한테 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는 처에게 절대로 아이 돈에 손대지 말라고 통장에 넣어두자고 했다. 처는 흔쾌히 동의했다. 아마 아이 통장은 후일 아이가 성년이 되면 돌려줄 것이다. 가끔씩 아이는 불만이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레고 장난감을 사려고 엄마, 아빠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시한 일가 친척에게 몸을 던지면서까지 재롱을 부려서 용돈을 받아 지갑에 모아 놨는데 만원이 되면 엄마가 바로 출금이 되지 않는 통장에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처에게 아이가 어른들께 받는 오천원 이상의 돈은 통장에 넣어도 작은 돈은 아이가 모아서 쓸 수 있게 놔두라고 말한다. 아이도 욕망이 있을 것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돈을 모야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가 자신의 목표액을 모으기 전에 내가 밑지고 사주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 등등의 명분으로....... 아마도 조만간에 닌텐도 DS를 사 줄 것 같다. 이럴 때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주문이 공염불임을 실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