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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북한산] 진달래 능선에 진달래는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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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동 계곡, 서울 북한산, 2010. 5.

5월 1일, 북한산 진달래 능선을 올랐다. 아직 진달래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갔지만, 정상 부근에서만 약간 볼 수 있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로 향하다 왼쪽에 있는 진달래 능선 길로 들어서니 진달래 꽃은 이미 지고, 꽃이 진 자리에 잎이 돋았다. 마감만 없었으면 지난 주에 갔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나무들 사이로 핀 진달래꽃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올해는 궁합이 맞지 않나 보다.

진달래 능선 중턱을 오를 때 같이 간 친구가 오른쪽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바위 아래로는 낭떠러지다. 잘못 내딛으면 헬기도 빼도 못추스릴 것 같다. 소나무 가지를 젖히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기가 막힌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조선후기 남종문인화의 거장 '전기(
琦; 1825~1854)'의 매화서옥도()와 유사한 풍경이다. 전기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초옥(草屋)이 아닌 와옥(瓦屋)이지만, 집을 둘러싸고 있는 꽃나무의 구도는 전기의 그림의 분위기와 유사했다. 비록 매화가 아닌 벚꽃이 기와집을 둘러싸고 있고, 강한 햇볕으로 몽환적 분위기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그럼에도 북한산 주봉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집과 이릉 둘러싼 꽃과 신록은 우리 산수화에 등장하는 구도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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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매화서옥도, 국립박물관 소장

현재 기와집은 기도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이 땅의 권력자들이 드나들던 '선운각'이라는 요정이었다. 요정에서 야합하던 정치 풍토가 다른 부패 공간에서 이루어지면서, 요정은 한정식집으로 간판을 갈았으나 결국 재정난으로 모 종교재단에 인수되었다. 서울시에서 인수한 삼청각처럼 남북회담의 역사적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풍광 좋은 곳을 문화시설로 활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진달래꽃이 진 능선에는 때늦은 벚꽃만이 낙화를 준비하고 있다. 매화도, 벚꽃도, 살구꽃도 꽃을 먼저 피우고 잎이 나오는 나무이다. 이 나무들은 꽃이 떨어질 때가 아름답다. 올해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꽃도 늦게 피었고, 언제 피었는지도 모르게 꽃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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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서울 북한산, 2010. 5.

4월 내내 끙끙거리던 일도 마무리짓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산행도 팍팍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그런지 몸도 무겁다. 그래도 능선 중턱에서 본 인수봉은 언제 봐도 우뚝하다. 백운대, 만경대와 더불어 삼각산 으뜸 봉우리이다. 인수봉 바위와 숲의 명암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풍의 먹의
농담(濃淡)은 같다. 다음 번에 오를 때는 흑백으로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이 먹의 농담을 쫒아가지는 못하겠지만.......

4월까지 봄과 겨울을 오가던 날씨는 이미 늦봄이다. 날이 풀린 주말이라서 그런지 오전부터 바위꾼들이 인수봉에 매미처럼(거미가 맞나) 매달렸다. 인수봉은 한국 암벽등산 상징적 장소만큼이나 안전사고도 많았던 곳이다. 강풍에 자일이 꼬이면서 7명이 매달린 채 사망했던 1971년 사고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 아래에는 산악구조대가 상설운영되고 있다.

암벽을 타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일까? 십여년 전 클라이밍을 잠깐 배울 때, 나는 암벽에서 전율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바위 사면을 오르는 릿지(ridge)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전율감은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트를 탈 때, 시간 대비 최고의 만족감을 준다. 암벽을 타든, 릿지를 하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로 산을 찾는다. 굳이 내가 산에 가는 이유를 들라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상하게 말하면 능선에서 여유있게 주위를 조망하는 즐거움때문에 산을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고도차에 따른 생태변화가 주는 즐거움 때문에 산에 오른다. 평범하게 말하면 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떨어지는 체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서 오른다. 낮과 밤을 거꾸로 생활하는 날이 많다 보니 이렇게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졸할 것 같은 위기감에 오른다. 누구나 이런 이유를 댈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한 때 정상정복의 희열감으로 산을 오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만 산을 찾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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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위 능선에서 본 정릉계곡, 서울 북한산, 20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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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위 능선에서 본 북한산 주봉, 서울 북한산, 2010. 5.


대동문에 올라 보국문 쪽으로 향했다. 보국문 못 미처서 칼바위능선으로 타고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칼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많아서 붙여진 칼바위 능선에서는 네 다리 동물로 변신했다. 능선을 내려가는 나나, 능선을 올라오는 사람들이나 모두 네 다리를 땅으로 뻗고 있었다. 오르는 사람은 가슴 쪽이 땅으로 향하는 정상적인 자세였는데, 내려가는 나는 등과 배의 방향을 번갈아 바꿔가는 고난이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능선 서쪽은 벚꽃이 한참이었다. 수년 전 홍천을 지나면서 처음 알았던 산벚꽃의 아름다운 자태가 생각났다. 비 그친 새벽의 청명함 속에서 점점이 찍힌 그 모습을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비그친 직후 이곳에 서면 홍천에서 본 그 찰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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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서울 북한산, 2010. 5.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을 배우던 시절에는 신록이 아름다움을 알지 못햇다. 하산하며서 본 이끼들도 겨울을 이겨내 몸통에서 새 잎을 내밀고 있었다. 갑자기 늦봄처럼 기온이 급상승했지만, 나무가지마다 새순이 만들어 내는 연초록의 색은 봄의 색채를 완연하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