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DMB라디오 '김갑수의 아름다운 오늘'에 매주 정기출연을 한 지도 두 달이 다 돼간다.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김갑수 선생님. 방송이 끝나고 스텝진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김갑수 선생님의 오디오와 음반이 있는 놀이방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당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책 관련 프로그램의 패널, 오디오 평론가, 방송인 등등의 직함을 갖고 있는지라 당신의 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마포 주택가의 상가 지하실을 통째로 빌려 LP로 가득 채운 그의 방을 작업실이라고 부르기도 그렇다. 당신 스스로 그곳을 노는 곳이라고 지칭하니, 나도 놀이방이라고 부르련다.
오늘 소개하려는 책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얘기를 했다. 김선생과 점심을 함께 하고 차 한 잔하러 갔다가 바로 볶아 내려준 커피를 두 잔(각기 다른 종류)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 편에 수북하게 책이 쌓여 있었다.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최근에 사진책(혹은 사진집)에 관심이 많았는데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을 담은 흑백표지의 이 책은 구본창의 사진집과 함께 눈에 띠었다. 구본창의 사진집에 수록한 사진들이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사진기행집(기행사진집이라 해야 하나)이다. 김선생님에게 달라고 하니 주저한다. 당신도 마음에 들어 한 쪽으로 분류한 책이라 한다. 물러서지 않고 졸라서 내것으로 취했다. 최근 발매된 구본창의 사진집과 함께.
사진작가 이광호의 쿠바 여행을 사진에세이 식으로 풀어놓은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담백함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쿠바를 흑백사진이 더 어울리는 곳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전체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장점은 사진과 여행 체험이 조화롭다는 것이다. 그 중 1장의 인상만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이광호의 사진 중에 '1장, 사진여행, 이번에는 쿠바다'의 '쿠바를 꿈꾸며'의 12~13쪽에 담겨 있는 사진이야말로 쿠바의 현 상황을 잘 표현한 사진이라 생각한다. 위 사진(12쪽)은 풍경사진의 구도라 할 수 있는 3분할 구도에서 약간 벗어나 정가운데를 기점으로 수직과 수평을 교차시키면서 아바나의 골목을 담은 이 사진은 쿠바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빛바랜 건물들 사이의 십자교차로에는 자전거 인력거와 낡은 오토바이, 자동차가 공존하고 있다. 아바나의 시가지에서 벗어난 곳으로 추정되는데 파스텔톤의 벽색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쿠바의 모습이다. 정십자가 구도에 배치된 쿠바의 오늘은 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 사진(13쪽)은 공터에서 쿠바의 국민스포츠인 야구를 즐기는 청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녁 무렵 햇빛이 기울면서 만들어 낸 빛은 낡은 스페인 풍의 건물에 비치어 따뜻한 정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사진도 십자 구도로 찍었는데, 오른쪽 아래에는 흰색(그늘진 부분이라 밝은 회색에 가깝게 느껴짐)의 건물이 왼쪽 상단과 하단의 황금빛 건물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마치 냉정과 열정이 대립 공존하는 것처럼. 골목 공터에서 즐기는 야구와 무료하게 앉아있는 이들 속에서 쿠바의 느림이 보인다.
쿠바의 느림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은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느림을 찬양하며 그곳을 이상향으로 부러워 하지만, 막상 쿠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가 없기때문에 느릴 수밖에 없다. 쿠바 혁명 이후 계속된 미국의 경제 봉쇄로 인해 쿠바의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미국에 큰 소리치고 있는 베네주엘라의 우고 차베스의 무기인 원유조차도 없는 이 나라의 유일한 수입원은 관광객들이 풀어놓고 가는 달러뿐이다. 냉전상황에서 소련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했지만, 소연방의 붕괴 이후 지원이 끊어지면서 쿠바는 관광에 의해서만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적 지원 품목 중 하나였던 비료 지원이 끊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실시된 유기농 농법과 도시가정의 텃밭 가꾸기가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는 왜곡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쿠바는 매력적인가 보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고,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감독 빔 벤더스도 그렇다. 적대적 관계(실은 쿠바 혁명이후 몰수된 재산때문에 원한이 사무친 미국 자본가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에 있는 미국에서도 쿠바산 시가가 최고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쿠바의 미래가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이광호의 책에는 없지만 나는 쿠바에서 생산되는 크리스탈마운틴 커피가 좋다.
작가는 이곳에서 잃어 버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특히 쿠바의 아줌마들에게서 모성애를 느끼고 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햇살에 비친 담벼락의 색처럼 쿠바는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기계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환경이지만, 역으로 기계적 삶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