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돌아오다
김갑수 선생님으로부터 또 한 권의 사진책을 받았다. 지난 번 당신의 작업실에서 두 권의 책을 탈취(?)당한 기억이 없으신가 보다. 당신도 다 보지 못한 책인데 사진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주신다. 이런 때는 염치불구하고 받아야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해방공간의 상황을 찍은 사진을 모은 것이다. 사진이 90% 이상을 차지하니 기록 화보집이라 명명해야 하나? 그런데 이 책은 해방공간의 현상을 담고 있는 책과는 다른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해방공간의 기록사진책은 일제의 패망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한국인들의 해방에 대한 기쁨, 한국 내 다양한 정치세력의 활동 상황, 민중들의 삶의 모습 등을 담고 있다. 물론 사진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도 다양하다. 성격도 미군정부의 공식적인 기록물부터 언론사의 보도 사진, 개인적인 작업물 등으로 다양하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은 앞의 기록들과 다르다. 해방공간을 기록한 사진의 대부분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혼란 과정과 민중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수록한 사진은 제국이 해체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제국의 팽창기에 조선에 이주했던 일본인들의 귀환과 중국에 이주했던 한국인들의 귀환이 미군의 시선 속에서 기록되고 있다.
미군이 들어와서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전까지 일본군은 여전히 조선반도의 지배자였다. 일본군이 무장해제되었음에도 한국인은 한반도 내에서 이뤄지는 일들의 주관자가 아니었다.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무장해제된 일본군의 철수 과정에서 한국인이 한 일은 미군의 검역 보조업무뿐이었다. 1부는 일본인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등국민으로 살아 왔던 그들은 한반도 내 수용소에서 DDT가루를 덮어쓰고,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 갔다. 이 모든 과정은 미군의 관리 하에 이뤄졌다. 일본 군대를 빨리 해산하기 위해 미군은 무장해제된 일본군부터 귀환시켰다. 이후 민간인의 대규모 귀환이 이뤄졌다.
2부는 한국인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한국인의 귀환은 일본과 중국에서 이뤄졌다. 일본에서는 부산항으로, 중국에서는 인천항과 부산항을 통해 귀환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시에 한국인을 의도적으로 이용했다. 불행하게도 일부 한국인들은 스스로 일제의 침략에 조력하기도 했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중국 내 한국인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했다.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한국인은 '밀정, 일제의 압잡이'였다. 물론 항일투쟁에 나섰던 한국인들도 많았지만 중국 내 한국인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성되었던 배경에는 중일 전쟁 이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중국과 만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일제의 점령지에 이주한 한국인은 일제와 같은 부류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국인의 귀환은 중국에서의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국에 남는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고 재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귀환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반증이다.
이들은 중국 텐진의 외항인 탕구(塘沽)에서 귀향선을 탔다. 미군은 상륙정으로 이들을 귀환시켰다. 그런데 이 배의 선장은 일본군이었다. 탕구에서의 귀환절차에도 항복한 일본군 장교의 서류심사 모습이 보인다. 미군은 최상위 관리자의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 실무자는 여전히 일본인이었다. 이 모습은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미군의 성격을 실감하게 한다. 미군에게 있어서 일본인이나 한국인은 변별해서 봐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두 민족은 기능적인 활용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책에는 매년 두 차례 이상을 방문하는 중국 텐진이 등장한다. 텐진의 외항인 탕구항이 한국현대사의 주요 공간 중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오늘날 텐진의 신개발구(새로운 공업지대)이자 중국의 주요 항구 중의 하나인 탕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된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출구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곳은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주요 무역항이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천과 탕구의 정기여객선을 타고 오간다. 텐진외대에 강의하러 갔다가 우연치 않게 들러 본 탕구 항의 모습에서 책에 실린 탕구항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새롭게 인식한 역사적 사실은 탕구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미군의 시선으로 찍은 사진들(미군의 공식적인 보고서에 포함된 자료 사진들)은 한국인의 저항적인 민족주의도, 일본인의 침략적 제국주의의 말로(末路)도 담겨있지 않다. 일본군의 귀환을 제외하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기회의 땅을 찾아 왔던 민간인들의 피곤함이 사진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영국의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변방사람이었던 스코틀랜드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외식민지로 나아갔듯이 조선과 만주, 중국으로 이주했던 일본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한국인들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중국인들보다 나은 이등국민으로 대우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선한 한국인만 떠올릴 수는 없다. 제국의 경계 내에 상주했던 사람들의 의식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판단해야 한다. 섣부른 의식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사진이 암시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로만 한국인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친일 모리배로 봐서도 안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제국주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당대 사람들의 면면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또 다른 시각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보게 해주는 이 책은 매우 가치있다 할 수 있다.
글을 읽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