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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내 인생의 소품]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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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칼로 연필을 깍았다. 얼마만에 깍았나 생각해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거친 필기감을 느끼게 하는 연필이 좋다. 내 책상 위에는 방금 깍은 오렌지 색  HB연필 세 자루가 있다. ㄷ사와 독일의 S사의 제품이다. 이들 회사의 연필을 특별하게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우개가 달린 오렌지 색 연필의 변하지 않은 디자인 때문에 이 제품을 주로 사용한다. 요즘 생산되는 연필은 심도 단단하고, 심을 둘러싸고 있는 목질도 잘 깍이지만, 어린 시절에 사용했던 연필은 그렇지 않았다. 목질은 너무 단단해서 깍다 보면 뭉텅이로 껍질이 벗겨지기  일수였고, 그나마 목질의 모양을 만들고 심을 다듬으려고 칼을 대면 연약한 심은 쉽게 부러져 버렸다.
 
그런데 어느날 손에 들어온 미제 연필은 모양은 비슷했는데, 품질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연필은 ㄷ사의 연필과 디자인이 유사했다(아마도 ㄷ사가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 연필은 지금도 미국영화에서 소품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미제 연필은 연필심에 침을 묻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한 글씨를 쓸 수 있었다. 당시 싸구려 국산 연필은 낮은 품질의 연필심을 사용했기 때문에 글씨 색이 진하지 않았다. 진하게 쓰려고 하다 보면 공책 종이(당시 공책의 지질도 좋지 않았다)를 찢는 것도 예사였다. 종이를 찢지 않고도 글씨를 진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연필심에 침을 묻혀 쓰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나와 친구들의 혓바닥은 꺼뭇했다. 이에 비해 미제 연필은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또 연필을 깍을 때도 얇게 껍질이 벗겨졌다.

당시 국산 연필은 한 다스(dozen의 일본어 표기 12개 한 묶음)를 사더라도 약한 내구성을 반증이라도 하듯 금방 없어졌다. 껍질과 연필심의 재료가 좋지 않다 보니 자주 부러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연필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의 접착 부분이 떨어져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국산연필의 재질은 정말 형편없었다. 그나마 지금도 연필을 생산하는 ㄷ사나 ㅁ사의 연필이 품질 면에서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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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연필마저도 초등학교 4학년 경에 샤프(펜슬)라는 신기한 자동연필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별로 쓰지 않은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대부분 볼펜을 사용했던 것 같고,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볼펜 류를 주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날 문구점에서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오렌지색 연필을 발견했다. 한 자루만 받아도 기뻐했던 지우개 달린 미제 연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연필이었다. 한 다스를 사와서 커터로 연필을 깍았다. 샤프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연필만 깎는 연필깎이 칼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단씩 잘라 쓰는 커터밖에 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연필 깎을 때 쓰면 연필깎이 칼이지.

연필로 필기할 때의 필기감은 샤프의 필기감과 비교할 수 없다. 종이의 거친 듯한 질감이 연필을 쥔 손으로 전해진다. 샤프 중에도 연필 심처럼 두꺼운 심을 갈아 끼우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연필 샤프도 연필과 같은 필기감은 없다. 또한 연필을 깍을 때의 촉감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샤프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동 중에는 샤프를 많이 사용한다. 그렇지만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종이 위로 거친듯이 미끄러지는 촉감과 '쓱쓱' 써지는 소리의 매력 때문이다. 자주 깎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은 오히려 즐거움이다. 어릴 때처럼 연필을 깎다 손을 베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연필을 깎다 보면 무엇인가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