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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신세계 백화점의 80주년 광고책과 식민지라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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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80주년 기념 행사 광고책 표지

11월 초, 신세계백화점이 상품광고책을 보냈다. 우수고객에게만 보낸다고 하는데 반갑지만은 않다. 백화점은 구매금액을 기준으로 우수고객을 선정할꺼고, 광고책자를 보내 돈쓰러 오라고 꼬신다. 신문에 끼어 오는 할인점, 동네 슈퍼의 전단지는 보지도 않거나 대충 보고 버리는데, 백화점에서 보내는 광고책은 꼼꼼하게 본다. 할인권도 있고, 무료주차권도 있고, 백화점에서만 단독으로 판다는 상품도 있고(단독기획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 하여간 열심히 사야할 물건의 할인권을 접어가며 본다. 아! 내 마음 속에 이렇게도 사고 싶었던게 많았나?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그러다 막상 백화점에 가면 왕만두 할인권과 굴비 할인권만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왕만두와 굴비 이외의 물건을 더 샀는지 할인권이 담긴 상품광고책은 한 달마다 배달된다. 두툼한(?) 할인권 책자와 얼마 이상을 쓰면 경품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장, 당일 얼마 이상을 쓰면 선착순으로 무료 공연을 보여준다는 안내장 등이 같이 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의 판형과 다른 봉투가 배달되었다. 익숙한 자세로 봉투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불꽃을 뿜어 내는 봉을 들은 모델(모델의 자세가 죽음이다. 저런 자세가 어떻게 나오지!)의 하단에 '오직(다른 백화점은 아니라는 말이겠지. 특히 롯데백화점을 겨냥한 표제어같다) 신세계백화점만 개점 80주년 기념'이라는 표제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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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80주년 기념 행사 광고책 3쪽

표지를 보고, 뒷장을 넘겨 개점 80주년 할인행사 내용(실제로 이 부분에 관심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리라)을 보려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표지 뒷장의 배경에는 신세계백화점 80년을 상징하듯, 1930년도부터 2010년까지의 80년을 각 년도를 표기해서 인쇄했는데, 특히 개업한 해인 1930년을 진하게 표시하고 있다. 어라! 신세계백화점이 80년이나 되었나? 일본의 미쓰코시백화점이 지금의 자리에 르네상스풍 3층 건물로 세우고 영업을 시작한 것이 1930년 10월이니까 여기서부터 연원을 계산했나?

그런데 이 책자의 어디를 찾아봐도 신세계백화점의 출발과 발전 과정을 알려주는 내용이 없다. "국내 최초 백화점인 본점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높인..."으로 되어 있는 (주)신세계 백화점 부문 대표이사의 인사말만 놓고 보면, 신세계백화점은 일제강점기에 창업해서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백화점인 셈이다. 회사 간에 인수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면 역사가 오래된 회사의 이름은 물론이고 창업년도까지도 올려잡는다. 신세계백화점 개점 80주년의 시점은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조선 최초의 백화점을 개점했던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의 개점 년도이다. 해방 이후 이곳에서는 적산(敵産, 해방 이전 일본 정부 혹은 일본인 소유의 재산) 재산을 불하받은 동화백화점이 영업을 했고, 6.25전쟁 때는 미군 PX로 이용되다가 휴전 이후 동화백화점이 영업을 재개했다. 1963년 삼성 그룹이 인수한 후,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도 이 상호를 쓰고 있으며, 1997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되었다. 신세계 백화점의 기원을 따져 보면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동화백화점이 등장하지만 신세계백화점이 최종적으로 인수했다면 창업년도를 1930년으로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세계백화점이 창업 80주년의 근거로 표현한 "국내 최초 백화점인 본점을~"은 "국내 최초 백화점인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을~"로 바꿔야 한다. 신세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자본이 창업한 백화점을 인수했고, 그 역사 또한 인수한 것으로 하면 된다. 미스코시백화점이 일제의 패망으로 쫒겨가고, 해방 이후에는 적산을 불하받은 동화백화점이 영업을 했으니까 창업년도를 1930년으로 해도 되고, 1945년으로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애매모호하게 "본점(이게 백화점 이름인가?)"이라고 쓰면 역사만 끌어 올리려는 술수이다. 일제강점기와 연관된 느낌은 배제하고, 창업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다고 부풀리면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사라진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상층계급을 주요 고객으로 삼고 경성에 직영 지점을 세웠던 미스코시 백화점의 창업년도도 가져오려면 "본점~"을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을~"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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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80주년 기념 행사 광고책 4쪽

정말 일제와 연관되는 내용을 지우고 싶다면 1945년을 창업 기점으로 삼으면 되고, 동화백화점도 마땅치 않다면 삼성이 인수한 1963년을 기점을 잡으면 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기업 간의 인수합병은 빈번하다. 인수당한 기업의 명운(名運, 命運이 아니다)은 인수한 기업의 의중에 달려있다. 기업이 합병되고 이름이 사라져도 역사는 남아있다. 인수 기업의 역사를 지우려면 당연히 창업년도는 인수한 시점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오직 신세계백화점만이 8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려면 최소한 "본점을~"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역사적 기원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80년의 역사를 증명해야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시기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모호하게 창업의 역사를 끌어 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식민지 시기와 연관시키지 않고 싶다면 해방 이후 창업했다고 하면 간단하게 문제는 해결된다.

집으로 온 광고책자와 달리 신세계백화점 누리집의 신세계 백화점의 연혁에는 "1930년 국내 근대 백화점의 효시인 미스코시 경성지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개점과 함께 한국 유통업의 근대화가 시작됐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기원이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신세계는 백화점을 모태로 국내 유통 근대사의 중심에서 함께 변모하고 성장해왔다"고 함으로써 미스코시백화점이 도입한 근대적 유통의 맥을 잇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누리집의 신세계백화점 연혁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편으로 배달된 광고책자의 내용만 볼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잊지 말아야 하는 현재이다. 일제강점기에 생성된 역사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여전히 미래에도 잔존할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이 모호하게 표현한 창업 80주년 기념이라는 표현에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이를 은폐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모호한 무의식이 병존한다. 일제강점기의 기억이 불편하다 해도 그 시기는 실존했던 역사이다. 기원을 끌어올리려고 역사를 은폐하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