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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설악산] 늦봄, 설악산을 오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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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껍질 적송, 강원도 설악산, 2010. 5.

천불동 계곡은 V자 형태의 협곡이다. 계곡 사면은 매우 가파르다. 하늘을 향해 뻗은 바위가 아래로 쏟아질 듯 가파른 곳에 백송 한 그루가 우뚜하게 서있다. 소나무의 표피가 흰색이라 백송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적송의 돌연변이같다.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백송의 흰색 껍질은 두껍지 않으면서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는데, 이 소나무는 두꺼운 껍질을 갖고 있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소나무들이 적송인 것으로 봐서는 백송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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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흔적, 강원도 설악산, 2010. 5.



천불동 계곡을 따라 양폭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을 준다. 등산로의 대부분을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계곡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공기는 몸의 열기도 식혀준다. 계곡 한 편에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왼쪽 화채능선에서 천불동을 향해 급경사를 이룬 곳에 큰  눈덩어리가 겨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은 여름의 초입에서도 녹지 않고 겨울의 정취를 전하고 있다. 북쪽 응달 중에서도 움푹 파인 곳에 쌓인 눈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디게 녹고 있었다. 그렇지만 온대 활엽식물의 활발한 기지개가 커지면 커질수록 눈덩어리는 녹아 형체가 사라질 것이다. 초록이 짙어가는 늦봄 언저리에서 겨울동안 쌓였던 눈을 본다는 것은 낯선 경험이다. 낮에는 여름, 밤에는 봄이 되는 5월의 설악산은 겨울과 신록, 초록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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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제비꽃, 강원도 설악산, 2010. 5.

천불동 계곡 사면에서는 봄꽃들이 일년농사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고 있다. 종의 번식을 위한 행위. 모든 식물이 꽃을 피우는 것은 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다. 봄 들꽃 중 제비꽃은 우리 땅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천불동 계곡에서 본 하양제비꽃의 색은 유난히도 희다. 천불동계곡을 흐르는 청정수의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일까? 하양제비꽃은 순진무구한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만난 제비꽃만 본다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최근 중저가 디지탈카메라가 대중화되면서 들꽃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접사모드까지 내장한 카메라는 일상에서 만나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기에 편리한 도구이다. DSLR카메라로 들꽃을 찍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번거로움이 덜하다. 그런데 편리함만큼이나 꽃을 담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 같다. 수십 가지 종의 들꽃을 식생(植生)하는 식물원에는 철마다 피는 들꽃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들꽃의 자생적인 환경을 배제한 채, 화단이나 화분에 담긴 꽃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은 진정한 들꽃 사진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들꽃의 자연적 생태를 사진 속에 표현한 것만이 진정한 들꽃사진이라 생각한다. 들꽃이 들꽃다울 수 있는 것은 들에 있기 때문이다. 들로 나가지 않고, 모집()된 공간에서 편하게 사진을 찍는 것은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도시인의 삶과 같은 것이다. 전문적인 꽃 사진작가들을 높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자생적인 환경에서 생장하는 꽃만을 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꽃보다 더 낮은 자세로 몸을 낮춰야 하고, 극한의 환경도 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을 담은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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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동 계곡, 강원도 설악산, 20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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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 강원도 설악산, 20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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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희운각 구간(1), 강원도 설악산, 2010. 5.


등산로는 계곡과 사면이 맞닿은 곳에 있다. 능선에서 급하게 뻗어 내린 낭떠러지가 계곡을 앞두고 활처럼 휘어지는 곳에 길이 났다. 우리의 옛길은 대부분 산자락의 아랫쪽, 흐르는 물길을 따라 만들어졌다. 비선대에서 양폭으로 오르는 길은 엣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길을 등산로로 정비한 것이다. 계곡을 넘어가야 하는 곳에 놓여진 몇몇 인공 구조물들은 끊어진 길과 길을 이어준다. 철재와 목재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전문적인 장비를 갖추지 않고도 산을 오를 수 있게 해준다. 사지를 바짝 붙여 올랐던 암벽 위에 구조물이 설치되면서 사람의 발길에 망가졌던 생태도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자연 생태를 보존하는 최고의 방법이 사람의 발이 닿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구조물의 설치는 권장할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습지나 암벽 등의 훼손을 막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고도 탐방을 할 수 있게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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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천당폭포 구간, 강원도 설악산, 2010. 5.


양폭산장에 다다를 무렵 굉음이 들렸다. 처음에는 계곡을 흐르는 급류가 만들어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 조금 더 올라가다 보니 급수관 틈 사이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굉음은 양폭산장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수력발전용 배관의 틈이 벌어지면서 수압때문에 나는 소리였다. 위쪽에서 공단 직원인 듯한 두 사람이 황급하게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양폭산장 관리직원인 이들은 수력발전시설 보수때문에 양폭산장을 문을 잠깐 잠갔다고 했다. 우리는 희운각대피소에 예약을 했고 양폭에서 머물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답했다. 양폭산장을 향해서 오르고 있는데, 시설 보수를 위해 하류로 내려갔던 직원들은 계곡과 바위를 건너 뛰며 우리를 앞질러 산장으로 갔다.  

양폭산장에 도착했다. 비선대에서 양폭산장까지 오르는데, 2시간 정도 걸렸다. 이곳은 십여년전 희운각으로 오르다 포기했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그때는 개인이 관리하던 산장이었는데, 최근에 공단에서 인수해서 새로운 시설로 건축했다. 관리자의 말로는 설악산 곳곳에 있는 대피소 중 소청대피소를 제외하고 모두 공단에서 직접 관리한다고 한다. 대피소의 관리 주체가 공단으로 바뀌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공단의 관리는 개인이 관리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쾌적한 산행을 지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설악산의 적지 않은 대피소가 개인적인 사욕을 채우기 위한 시설은 아니었고, 한국 등산의 역사에서 적지않은 기여를 한 곳이기에 다소 아쉬움도 남는다. 십여년 만에 본 양폭 산장은 과거의 누추하고 좁은 산장은 아니었다. 국립공원에 지어지는 대피소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러한 시설이 오염을 방지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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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희운각 구간(2), 강원도 설악산, 2010. 5.

속이 출출했다. 큰 배낭이 없어 먹을 것은 대피소에서 파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올랐던 터라 배낭에는 고열량의 초콜렛 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도 양폭산장의 관리인들이 돌아와서 과자와 캔커피를 살 수 있었다. 양폭산장 데크에 앉아 천불동 계곡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맛이 좋았다. 평소에는 유난떠느라 쳐다 보지도 않던 캔커피였지만,.....   

양폭에서 희운각으로 오르는 길에 가설된 계단과 교량을 쳐다 보면 아찔하다. 십여년 전 겨울, 대청봉으로 가다 이곳에서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효율적으로 꾸린 무거운 배낭에다가 아이젠까지 신고 오르면서 나의 한계를 절감했던 곳이다. 철재로 만들어진 구조물의 바닥에는 폐타이어를 활용해서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최근 국립공원에 설치된 구조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환경에 무해한지는 모르겠다. 타이어를 고무만으로 만들지 않다 보니 재활용된다고 해도 중금속 등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젠을 신고 겨울산을 오르는 사람들에 의해 패여지는 구조물을 보호하고, 등산객들의 안전한 산행을 지켜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물을 설치한 의도가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생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폐타이어 재활용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폐타이어 조각을 밟을 때마다 미세한 오염물질이 계곡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