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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덕유산] 비바람 몰아치는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3)

향적봉에서 구천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수월하다. 설천봉까지 기계를 타고 온 터라 비만 오지 않는다면 쾌적한 산행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등산보다는 하산 과정이 더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왠지 힘이 덜 들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향적봉은 정상의 암석 지대를 제외하고 관목 지대와 초지를 보호하기 위해 목조 구조물을 설치한 곳이다. 아마도 다른 국립공원 봉우리들처럼 온전히 걸어서 올라야만 하는 곳이라면 이렇게까지 보호막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타고 와서 향적봉까지 산책 삼아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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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향적봉,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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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향적봉, 전북 무주, 2010. 7.


향적봉에서 중봉을 거쳐 구천동 계곡으로 내려가려고 생각했는데, 정상에 짙게 낀 운무 때문에 백련사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중봉으로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20여분 정도 내려가다 보니 중봉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구천동 계곡 상류에 있는 백련사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인해 습기가 온몸을 덮고 있었다. 비때문에 지리산 산행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산 넘고 물 건너 왔건만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맞은 폭우에 비하면 낯 간지러운 정도로 오는 비였지만, 산행을 힘들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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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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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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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폭우가 아니라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도 사진기가 비에 젖을까 봐 쟈켓 안에 품고 있다 찍을 때만 꺼냈다.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덕유산에 걸쳐 있는 구름대를 뚫고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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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향적봉, 전북 무주, 2010. 7.

우리는 구름을 관통해서 백련사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산 아래에서 보면 봉우리 아래에 살짝 걸쳐 있는 구름이겠지만, 구름 안에서는 가까운 거리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가까이 있는 나무들의 경계를 벗어나면 희뿌연 안개 이외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안개 속에서 걷는 숲길은 나름대로 운치있다. 끈적거리는 느낌만 없다면 숲에서 만나는 녹색의 향연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경은 비가 와야 만들어진다. 맑은 날의 산행에서는 볼 수 없다. 지리산에서 비를 흠뻑 맞지 않았다면, 이 풍경이 경이롭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너무 많은 비를 맞아서인지 이보다는 내리쬐는 햇볕이 그리웠다.    

사진기를 꺼낼 때를 제외하면 땅만 보고 걸었다. 행여라도 상의의 벌어진 틈으로 비가 들어와 카메라를 적실까봐 두 손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걸었다. 백련사 쪽에서 향적봉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다. 백련사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이들과 반대 경로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곳곳의 암벽 지대에 만들어진 구조물을 보니 이 산행로의  난이도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백련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도 가파른 이 길의 상태를 증명하고 있었다.

구름대를 거의 다 뚫고 내려왔나 보다. 운무의 농도가 옅어지고, 산행로 아래쪽으로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백련사에 도착했다.  향적봉에서 이곳까지 2.5km의 거리가 참 멀게도 느껴졌다. 비 때문이리라. 비 그친 백련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풍수지리는 잘 몰라도 절을 둘러싼 앞뒤좌우의 산세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백련사의 요사채는 반가(班家)의 형태와 닮았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은 6.25 전쟁 이후 지어진 것이라 고풍스러운 느낌을 별로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련사 경내에서 보는 덕유산의 산세와 사찰 건물의 조화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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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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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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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백련사, 전북 무주, 2010. 7.


 범종루인지 법고루인지 용도를 확인하지 못한 문루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몸을 뒤덮고 있던 비의 무게를 걷어냈다. 비에 젖은 상의를 벗어 털고, 배낭의 방수포를 벗겨서 빗물을 털고, 등산화까지 벗어서 빗물과 습기에 불은 고단한 몸에 모처럼 신선한 공기를 씌워 주었다. 루(樓)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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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일주문,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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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일주문 단청, 전북 무주, 2010. 7.



매월당 설흔 스님의 부도를 비롯한 여러 부도들이 있는 부도군 앞에 있는 일주문의 단청 색은 탈색되었지만, 오히려 그 색감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백련사부터 덕유산 야영장까지 가는 길은 구천동 계곡의 옆에 만들어져 있다. 폭이 넓은 이 길은 최근에는 자전거로도 오를 수 있다. 삼공리에서 백련사까지 오르는 길의 경사가 완만해서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만 매표소까지 2시간을 내려가는 동안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이 길을 오르내리는지 의문이 생겼다. 게다가 이 길의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아스콘 포장길과 그 색상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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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 자전거길,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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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 자전거길, 전북 무주, 2010. 7.


지금은 파란집에 계시는 분이 서울 시장 시절에 버스전용차로에 깔은 붉은 색 아스콘 포장을 연상하게 했다. 붉은 색 아스콘 포장을 할 때부터 내구성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그 분은 밀어 붙였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색 버스전용차로는 일반적인 아스콘 포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분의 생각과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는 분들의 걸작을 접하게 될 줄이야..... 내구성이 약한 아스콘으로 포장한 이 길 또한 군데 군데 아스콘이 벗겨지고 있었다. 이 길이 반드시 포장해야 하는 길인지도 의문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포장을 해야 했다면 자연과 어울리는 색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의 중간 중간에 황토색으로 포장한 시멘트 길도 있던데, 오히려 그 색으로 포장하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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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내의 길은 가급적 포장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찰들의 요구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립공원 내에 포장된 도로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급적이면 도로를 조성할 때 땅 위에 아무것도 덮지 않아 땅도 숨쉬게 할 수 있는 것이 국립공원 지정의 취지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포장을 해야 한다면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해서 조성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램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구천동 길처럼 두드러지는 색으로 도로를 포장하는 것이야말로 전시행정의 전형일 것이다.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을 생각하지 않는 이 우둔함이 그 색상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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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구천동 계곡,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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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구천동 계곡, 전북 무주, 2010. 7.


구천동 길은 유치찬란한 색의 자전거길을 제외하면 절경이다. 늦가을 단풍이 물들 때 이 길의 멋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같다. 계곡의 좌우에서 자라는 단풍나무를 보니, 만추의 계절이야말로 무주 구천동의 절경을 제대로 보여줄 것 같다. 비가 많이 온 탓인지 계곡의 물이 불어 있었다. 힘차게 쏟아내며 내려가는 급류 소리가 비온 뒤 계곡의 청량감을 높이고 있었다. 갈수기에 접어드는 늦가을 구천동 계곡에서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흐르는 계류와 하늘을 차단한 홍단풍 무리가 홍백의 조화를 이루며 빛날 것이다. 올 가을 여유가 생긴다면 이곳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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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구천동 계곡, 전북 무주, 20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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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구천동 계곡, 전북 무주, 2010. 7.


비가 개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몸을 휘어감은 끈적거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우가 쏟아졌던 탓인지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음에도 사람들은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오랜 세월 덕유산 산자락에서 흘러 내린 물은 바위의 표면을 매끈하게 하고, 다양한 식물이 자랄 수 있게 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인 이끼 낀 바위 옆을 급류가 휘돌아 흘러갔다. 매표소가 있는 삼공지구로 가는 길에는 계곡 물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진 자연 습지도 보인다. 물이 들고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이곳에는 융단같은 이끼 위로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제발, 이렇게 두어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에 삽질을 하지 말자. 밑바닥까지 긁어 내고 시멘트로 들이 붓는 토건마피아 집단들의 사악한 논리로 가짜 자연을 만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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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 계곡 자연습지, 전북 무주, 2010. 7.


구천동 계곡을 벗어나니 덕유산 국립공원 삼공지구이다. 비가 개어서인지 야영장으로 들어 가는 차량들이 줄지어 서있다. 향적봉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져 있었지만, 무주리조트에서 오르면서 봤던 크기에 비하면 많이 오그라져 있었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려면 햇반을 꺼내서 먹여야 했지만, 산행의 끝이라 산채비빔밥으로 해결했다. 맛은 그저.... 그래도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발도 씻고 나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서울가는 막차 대신에 무주를 거치는 대전행 직행버스를 탔다. 여전히 먹어 치우지 못한 햇반 꾸러미와 기타 등등의 부식을 들러 메고....

애초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으나, 폭우때문에 입산하지 못했다. 아쉬움을 달래고자 덕유산 산행으로 즉석에서 변경할 때만 해도 험난한 여정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산행의 부산물들은 아직도 집에서 대기중이다. 덕유산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한동안 너무 바빴다. 산행을 마치고 50여 일만에 산행기를 마무리한다. 그러고 보니 5월에 갔다온 설악산 산행기는 마무리도 못짓고 있다. 동행했던 친구가 빨리 마무리 지으라고 성화다. 자기 블로그에는 사진만 딸랑 올려놓고, 자기는 글쟁이가 아니라나! 대학 시절을 회상해 보면 친구는 시인을 꿈꾸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휴면중이다. 언젠가는 멋진 산행시들이 자신의 블로그를 장식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