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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북한산] 비봉능선을 오르다

지난 주 산행에서도 약속한 시간보다 늦었는데 이번에도 20분이나 늦었다. 불광역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어떤 말로 변명해도 구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냥 웃음으로써 미안한 내 마음을 표현했다. 친구와 산행을 같이 한지도 일년째이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산에 오르지도, 산이 나를 불러서 오르지도 않지만 한 번, 두 번 오르다 보니 벌써 북한산에 열 번 넘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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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서울 북한산, 2010, 11.

 "소싯적에~"과 관련된 산의 기억을 지우기로 했다. 다람쥐처럼 산을 오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등산 안내지도에 적힌 시간대 안으로 목표점에 도착했었던 기억, 무거운 장비를 메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허풍떨던 기억, 겨울산이 좋아 갔다가 낙오 직전에 정상을 포기하고 돌아섰던 기억 등을 지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비장한 각오로 산행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몸이 따라 가주는 선에서만 오르기로 했다.

느리게 오르기로 했다. 아니 몸이 따라주지 않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등산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느린 산행의 핑계를 찾아야겠는데, 그래야 모양새를 구기지 않으면서도 산행할 수 있겠지. 핑계거리를 찾다 보니 사진기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으려면 잠시 멈춰야 하니까 좋은 핑계거리를 찾았다. 사진을 찍으면서 숨가쁘게 터질듯한 심장의 고동을 안정시킨다. 고뇌에 찬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숨고르기 때문에 섰는지, 아니면 사진을 찍기 위해 멈췄는지 나도 헷갈린다.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객이 전도된다. 다행이도 산행의 동반자 친구가 사진에 관심이 많아서 내 꼼수를 받아준다. 꼼수인 줄 알면서 받아주는지 자기도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려면 어쩌랴. 산도 타고 사진도 찍으면(전후를 바꿔야 하나) 꿩먹고 알먹고인데.

오늘도 비봉 능선을 타기로 했다. 지난주에 한시간 반이나 늦게 와서 중도에 포기했던 길이다. 몰상식한 이웃때문에 잠을 설치고 나섰던 지난주 산행에서는 날씨까지 좋지 않아 결국 사모바위까지만 가고 내려와야 했다. 비봉능선을 다시 한 번 가보자고 친구에게 부탁하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산행에 필요한 부식을 모두 내가 준비하겠다며 자세를 낮췄더니 염치없는 내 요구를 들어준다. 친구와 다시 비봉능선을 오르기로 약속했다. 불광역에서 만난 친구는 자신이 약속대로 평소보다 먹을 거리를 적게 챙겼는지 배낭이 홀쭉해 보인다.  그 친구가 챙겨온 것은 막걸리 한 병과 컵라면뿐이었다. 평소 반드시 챙겨오던 바나나도 없고, 삼각김밥 등등을 집어 넣었을 그의 배낭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배낭의 무게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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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구름정원길) 스카이워크, 서울 북한산, 2010. 11.

불광역에서 내려 최근 조성된 북한산 둘레길의 구름정원길 구간으로 들어섰다. 새로 건축된 아파트 때문에 북한산생태공원 쪽으로 돌아 가야만 족두리봉으로 가는 능선길이 나온다. 원하지 않앗지만 방송사 화면에 자주 나왔던 하늘전망대와 스카이워크를 지나가게 되었다. 모양새가 그럴 듯 했는지 개장 소식을 알리는 뉴스의 배경 화면으로 자주 등장했던 곳이다. 산 아래로 가면 되지, 바위에 구멍을 내고 철기둥을 박아 다리를 만들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스카이워크라! 이 길을 걸으면서 누가 하늘 위를 걷는다고 생각할까? 멀쩡한 바위는 인공구조물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안전한 산행과 생태 보호를 위해 설치하는 구조물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곳까지 망가뜨리면서 길을 만들어야 했을까? 아무래도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공단이 할 일은 아니다.

제주도 올레길이 알려지면서 걷기(이건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역자치단체는 물론이고 국립공원관리공단마저도 걷기 좋은 길을 만든다고 야단 법석을 떤다. '1박2일'이라는 오락프로그램이 지리산 둘레길을 다룬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지리산 둘레길로 몰려갔다. 떼를 이루어 걸으면서 사람들은 염치가 없어졌다. 집단으로 몰려 다니면서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는 걷기 광풍(狂風)은 광란(狂亂)이다. 자기 사는 곳에서는 한 정거장 거리도 걷지 않는 사람들이 올레길, 둘레길 걷기를 승전보처럼 떠벌리는 상황은 유치한 코메디이다. 동네길조차도 걷지 않으면서 올레길, 둘레길에 가서만 걷는 것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유행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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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동, 서울 북한산,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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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봉 옆길, 서울 북한산,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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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봉, 서울 북한산, 2010. 11.


둘레길을 등지고 족두리봉 쪽으로 오른다. 추운 날씨때문에 몸이 쉽게 덥혀지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아래쪽을 보니 불광동 일대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 지난주에 오른 족두리봉은 지나치기로 했다. 지난 주에는 가을 정취가 남아 있더니 벌써 겨울이 불쑥 다가온 것 같다. 족두리봉 사면에 있는 우회로는 응달이 져서 그런지 가을색조차도 없다. 멀리 보이는 비봉을 등지고 족두리봉 쪽을 보니 바위 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바위 아래에서 재촉을 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은 선뜻 내려서지 못한다. 아무래도 먼저 내려선 사람의 꾐에 빠져 바위를 타나 보다. 산 잘 타는 사람을 쫒아 가면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르고 가면 쫒아갈 수 있지만, 한 번 따라갔다 오면 다시는 따라 가고 싶지 않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작년에 아무 생각없이 의상능선을 따라갔던 내가 그랬다. 아마도 위에 있는 사람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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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능선(1), 서울 북한산,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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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뿔소 바위, 서울 북한산, 2010. 11.


비봉으로 오르다 코뿔소 바위 앞 너럭바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코뿔소 코 뒤로 보현봉이 보인다. 친구가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나도 뜨거운 물을 담아온 보온병을 꺼냈다. 친구는 자기가 갖고 온 물을 컵라면에 부으려 했다. 재빨리 내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 담아 오라고 해서 많이 담아 왔는데"라며 타박하는 친구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이 나도 이 상황에서는 모른다고 해야 한다. 배낭 무게 중 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만만치 않다. 물무게를 줄여야 배낭이 가벼워진다. 이 상황에서 난 이기적인 놈이다. 친구가 "빵꾸똥꾸(이 친구가 나에게 잘 쓰는 말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라고 투덜대지만 무시한다. 이럴 때는 이솝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 몸에 좋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익기를 기다긴다. 족두리봉을 어렵게 내려온 등산객들이 비봉으로 올라왔다. 그들 중 두 명은 족두리봉에서 무진 애를 썼는지 비봉 정상까지 가지 말자고 애원한다. 단단히 겁을 먹은 표정이다. 그들에 이어 또 한 무리의 남녀 등산객들이 올라온다. 이들을 바라 보면서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컵라면은 익는 것일까? 아니면 불는 것일까?). 비봉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두 유형이다. 바위를 잘 타는 사람들을 두 발로, 다른 사람들은 사지를 이용해서 진흥왕순수비(사실은 모조품이다)가 있는 정상으로 오른다. 물론 나는 온몸을 이용해서 오른다.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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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순수비(모조품), 서울 북한산, 2010. 11.


바위타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서(사실은 무섭다) 바위 구간을 우회하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비봉 정상에 올라 가자고 했다. 전부터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던 곳을 가보고 싶었다.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진흥왕순수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나는 중학교 때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이 비석을 처음 봤다. 비바람에 훼손 정도가 심했던 이 비석은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옮겨졌는데, 박물관 전시실이 아닌 근정전 회랑에 세워 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유물 전시방식에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나 보다. 하긴 폭압적인 유신 정권 상황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을텐데.
 

일제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설치하고 궁의 전각을 해체한 곳에 전국 각지에서 탈취해 온 석조 유물을 전시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도 진흥왕순수비를 옮겨 와서 근정전 회랑에 세워 놓았다. 어렴풋이 기억을 살려보니 진흥왕 순수비는 삼면이 개방된 회랑에 세워져 있었고, 일미터 정도 되는 목책으로 둘레를 쳐서 사람들이 만져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의 중심전각인 근정전의 상징성을 무시하고 국립박물관의 야외창고처럼 근정전 회랑의 용도를 변경했다.

비석의 머리만 가려주면서 보존이라고 하니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이 시기에는 석조문화재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한다며 보호각을 만들었는데(특히 석굴암과 서산 마애삼존불 등), 진흥왕 순수비를 회랑에 방치하다시피 세워놓는 발상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비봉에 전각을 세워 진흥왕순수비를 투옥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석이 세워져 있었던 자리가 좁지 않고 약간의 공간이라도 있었으면 전각을 세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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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순수비 모조품, 서울 북한산,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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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체의 영향 , 서울 북한산,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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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체, 서울 북한산, 2010. 11.


지금 비봉을 지키는 비석은 2007년에 세운 모조품이다.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하지만, 모조품의 빤질빤질한 표면이 눈에 거슬린다. 이 모조품뿐만 아니라 복원중인 북한산성 성곽에 쓰여진 돌들도 빤질빤질하다. 이렇게 허여멀건한 돌을 보고 역사를 생각하라고 한다. 오히려 토목공사의 문제점을 생각하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문화재 복원도 토목공사처럼 시멘트 떡칠을 해놓고, 원형을 살리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비봉에 서있었던 흔적까지 모조품에 담아 복원했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비석 표면에 음각된 한자의 서체를 보니 예서(隸書)와 해서(楷書)가 섞여 있다. 해서로 쓰여진 글씨도 가로폭이 넓어 예서의 영향이 강하다. 소(所)자는 전형적인 해서체로 쓰여졌지만, 아직은 세로폭보다 가로폭이 길다. 몇몇 글자는 삐침 등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데 예서의 잔존이다. 진흥왕순수비의 서체는 해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강 일대를 장악하고 당(唐)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진흥왕은 선진국가 당의 문물을 수용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예서는 진을 무너뜨린 한(漢)의 서체였고, 해서는 중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당(唐)의 표준 서체로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다. 국제국가 당의 학문은 해서체로 인쇄된 책을 수입했던 주변국에 영향을 주었고, 진흥왕 순수비의 해서체는 이런 과정에서 새겨졌으리라.

신라는 당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한 단계 위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구축한다. 나제동맹을 파기하면서 한강유역을 점령한 진흥왕은 이곳에 비석을 세워 신라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 555년에 진흥왕이 북한산에 왔다 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이곳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게 해준다. 진흥황이 비봉 정상에 올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강 일대를 점령하면서 신라인들은 상류에서 하류까지 배를 타고 내려와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당으로 가는 이 길을 따라 신라의 사절단과 유학생들이 오갔고 이들은 신라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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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 정상, 서울 북한산, 2010. 11.


진흥왕은 북한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비봉에 자신의 순수(巡狩)를 기록했다. 비봉 정상에 서면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방을 둘러 보면 북쪽을 제외하고 서울 시내로 뻗어 가는 능선을 볼 수 있다. 비를 세웠을 때에는 지금보다 더 먼 곳까지 한강 주변의 평지를 보았을 것이다. 비봉 정상에서 굽이굽이 뻗어 내린 능선과 계곡이 한강으로 이어진다. 비봉 정상에서 사람들은 이 경관에 매혹된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정복한 사람들은 이곳을 자신의 기념비로 삼으려 한다. 그들처럼 나도 사진을 찍고 비봉에 올랐음을 증명한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보았던 진흥왕수순비가 있다고 상상하며 비와 함께 능선을 굽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