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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속의 세상

저녁노을에 취해

익산 미륵사지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이십 여 년만에 찾아 가다 보니, 이곳을 어떻게 왔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정작 사진에 담으려 했던 미륵사지 석탑은 해체 복원중이라 볼 수 없었다. 몇 년 전 신축(절대 복원이 아니다)한 흰 석탑만이 저녁 노을에 물들고 있었지만, 그 생경함이란...... 

미륵사지(1), 전북 익산, 2011. 4.

미륵사지(2), 전북 익산, 2011. 4.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 나오다 미륵사지 연못에 비친 노을이 예뻐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카메라에 담았다.
같이 간 선배에게 '아트야'를 내뱉으며 나의 사진 실력에 도취된 순간, 메모리에 장애가 발생했다.
차에 두고 온 여분의 메모리를 가지러 가면 이 광경을 담을 수 없는 상황. 두 대의 카메라를 갖고 갔던 터라 메모리를 바꿔가며 붉은 노을을 찍었다.

이 때까지는 좋았다. 여전히 '아트'의 감흥에 취했었나 보다. 메모리에 생성된 여러 개의 폴더에서 중요한 이미지를 옮겼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삭제 단추를 눌렀다. 연재 기사 작성을 위한 자료 사진들이 삭제된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온 뒤 자료 사진을 보려고 했더니 없다. 아! 이 허무함. 연재 기사 작성을 위해 찍었던 '군산'의 이미지들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도 '아트'를 연발하며 담았던 이미지는 살아 있다. 연재 기사 자료는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궁남지(1), 충남 부여, 2011. 4.

궁남지(2), 충남 부여, 2011. 4.


자료 사진을 날린 지도 모르고, 연못에 투영되는 저녁 노을에 꽂혀 부여 궁남지에 들렀다. 또 다시 '아트'를 내뱉으며 열심히 좌우를 오간 끝에 몇 개의 이미지를 얻었다. 삭제된 지 알았다면 부여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서 담을 수 있었던 궁남지의 저녁 노을.
 

궁남지(3), 충남 부여, 2011. 4.


지루하게 달려야 하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떠오른다. 이번 주에 가면 '군산'은 벚꽃 천지겠지만,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하니 갈 수도 없다. 저녁 노을이 보여주는 몽환에 취해 '아트' 운운하다, 정작 중요한 자료를 잃었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저녁색을 보며 우울하게 '아트야'를 내뱉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