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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며

[책글] 계림에 빠지다 - 계림몽환(桂林夢幻)

久保田博二, 写真集 桂林夢幻, 東京, 岩波書店, 1982

久保田博二, 写真集 桂林夢幻, 東京, 岩波書店, 1982

작년 11월 중순 일본 출장 일정의 마지막 날 간다(神田) 고서점가에 들렀다. 개인적인 일정을 갖기 어려웠던 출장이라 돌아오는 날에나 겨우 나만의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간다의 고서점가에서 사진집을 사고, 여유가 되면 유라쿠초(有樂町)에 있는 니콘 갤러리까지 들려 보기로 마음먹고 시나가와(品川) 역으로 갔다. 

일행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저녁시간까지 돌아오려면 서둘러야만 할 것 같다. 시간을 아끼려면 숙소가 있는 시나가와 역에서 JR야마노테센(山水線)을 타고 시부야(渋谷)에서 내린 후, 도쿄메트로 한조몬센(半蔵門線)을 타고 진보초(神保町) 역에서 내려야 한다. 이렇게 가면 환승 할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두 번 표를 사야 한다. 일본은 전철운영회사가 다르면 환승시 요금을 할인해주지 않는다. JR만 이용해서 가게 되면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고서점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메이지, 니혼 대학 등의 유서깊은 건물들을 볼 수 있고, 스포츠레저용품과 악기상가의 상품들도 구경하다 보면 금방 간다 고서점가에 도착한다.   

오가와마치(小川町)에 있는 겐키도쇼텐(源喜堂書店)부터 들렀다. 간다의 고서점들은 대부분 가게 별로 취급 영역이 전문화되어 있는데, 이 서점도 미술 관련 책만을 취급한다. 회화, 조각, 판화, 서예, 사진 등의 도록은 물론이고 관련 서적들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이곳은 중고책만 팔지 않는다. 독자들이 보고 내놓은 중고책들이 많기는 하지만, 절판되어서 일반 서점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많다. 서점 밖의 가판대와 계단 등에는 아주 저렴한 가격이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매장 안에서 가판대로 밀려난 책들은 매우 싸다. 겐키도쇼텐 정가의 70% 정도이다. 가판대로 나온 책들의 대부분은 점포 안에 있는 책에 비하여 비중은 낮지만, 그렇다고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고관리 차원에서 가판대에 내놓은 책들 중에는 양질의 도서도 적지 않다. 


지금 소개하려는 구보타 히로치(久保田博二)의 사진집 <桂林夢幻>도 가게 밖의 가판대에서 찾은 책이다. 이미 고른 몇 권의 책 위로 이 책을 얹어 놓았더니, 서양인 두 명이 내가 골라 놓은 것인지 모르고 만지작 거린다. 구입할 책을 쌓아 놓은 모습이 가판대와 계단 등에 쌓아놓은 책무더기 모양과 비슷해서 판매하는 책인 줄 알았나 보다. 'my book'이라고 하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내려놓는다. 사진집의 상태에 비하여 싸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내뱉은 말이 세게 들려서였을까? 하여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 사진집은 구보타 히로찌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촬영한 꾸이린(桂林)의 비경을 담고 있다. 꽝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에 있는 꾸이린은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진(秦)대부터 화난() 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할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다. 경승이 뛰어나고, 오래된 도시인 만큼 이곳을 예찬한 문인들의 시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후한(後漢)시대의 장헝(張衡, 78~139)이 <四愁詩>에서 '꾸이린'이란 이름을 최초로 시에 표현한 이후, 많은 문인들은 이곳에 대한 인상을 시로 남겼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넘치는 지금도 꾸이린을 찾았던 사람들은 이곳의 인상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담아간다. 그만큼 꾸이린은 사람들에게 경탄할 만한 인상을 남기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구보타 히로찌의 <桂林夢幻>은 꾸이린에 대한 인상을 담은 사진집이다. 그런데 구보타는 이미지만으로 꾸이린의 인상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사진과 선인(先人)들의 한시(漢詩)를 결합시키고 있다. <桂林夢幻>에서 한 면은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를 배치하고, 다른 한 면에는 그 이미지에 걸맞는 한시를 배치했다. 꾸이린의 특이한 지형은 오래전 석회암 지대였던 곳에 해저에서 봉우리들이 솟아오르면서 만들어졌다. 특이한 모양의 봉우리들을 중첩으로 잡아낸 구보타의 이미지들은 수묵화의 느낌을 준다. 그는 봄과 가을, 봉우리들이 보여주는 은은한 색을 농담(濃淡)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이 사진과 어울리는 한시로 북송(北宋)의 저우하오(鄒浩)가 노래한 '應是天公醉時筆,重重粉墨尚縱橫'을 선택했다. 구보타는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이 시구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결과를 얻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꾸이린의 하늘에서 꾸이린을 조망하며,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항공촬영을 통해 담았다. 그는 후기에서 정작 촬영작업보다 중국정부를 설득하는 협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1978년 중국공산당은 덩사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을 추인했지만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 중국은 여전히 폐쇄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항공촬영을 쉽게 허가해 주지 않았다.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항공촬영을 중국인에게도 잘 허가해 주지 않던 중국정부가 외국인인 그에게 허가를 내주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허가를 받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는 그가 나열한 적지 않은 기관명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당중앙위원회'와 '당군사위원회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권력기관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런 역경을 극복한 끝에 얻은 꾸이린의 항공촬영 이미지들은 이곳이 수묵(水墨)의 선경(仙景)임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꾸이린을 찾았던 많은 사진가들은 꾸이린 안 에서만 이미지를 담았다. 구보타의 사진작업에 비하여 그들이 이룬 성과가 낮다고 평가할 수 없지만, 구보타의 작업은 분명히 그들보다 진전되었다. 그는 꾸이린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꾸이린 바깥의 시선으로 이곳의 이미지를 담는데 성공했다. 꾸이린의 하늘에서 이곳을 담은 구보타의 사진은 이곳이 추상적 수묵의 공간과 잘 어울리는 곳임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특히 구름 속에 잠긴 봉우리의 형상은 준법(皴法 : 동양화에서 산에 있는 돌, 바위 등을 그릴 때의 화법)으로 표현된 전통적 산수화의 산세를 닮았다. 
 


스물일곱 장면을 담고 있는 <桂林夢幻>에는 항공촬영 이미지들만 있지 않다. 석양을 등지고 우뚝 선 암회색 음영(陰影)의 봉우리는 황금색 논과 대조된 모습으로 담겨 있다. 꾸이린의 하늘과 산, 논은 구보타가 포착한 장면에서 하나의 오브제(objet)가 된다. 그는 이 장면을 담기 위해 봄마다 꾸이린을 찾았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명물 가마우지 낚시도 등장한다. 오늘날은 리장(漓江)에서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의 모습이 관광상품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여전히 어부들은 우뚝 선 봉우리들 호위를 받으며 리장에서 고기를 낚는다. 옛날처럼 물고기를 잡든지, 아니면 오늘날처럼 관광객들에게 가마우지 낚시를 보여주는 수입으로 살든지, 리장은 꾸이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수인 셈이다. 

구보타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 동안 꾸이린의 비경을 담는 사진작업을 위해 이곳을 수차례 찾았다고 한다. <桂林夢幻>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구보타의 <桂林夢幻>에 수록된 이미지들은 근대 서양에서 개발된 사진술이 동양적 수묵화로 재현될 수 있음을 증명해 준다. 구보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