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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지고 또 피고


호접란, 서울, 2015.8.자청비(장생란), 서울, 2015.8.

부영(다육식물), 서울, 2015.8.


카메라를 손에 쥐고 제일 먼저 찍은 사진은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이었다. 칼자이즈 렌즈의 기능도 테스트할 겸해서 찍어봤는데 고성능 DSLR로 찍은 사진에 근접할 정도로 괜찮다. 물론 마이크로 렌즈처럼 다양한 연출은 불가능하지만 내 몸을 고생시키면 삼각대를 안 쓰고도 좋은 구도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올해 초 이사하고 집안이 건조해서 사온 호접란은 화사한 자태를 보이고 죽었다. 화원에서 최적의 상태로 출하한 서양란들은 꽃을 즐기는 식물이다. 서양란은 꽃이 지면 서서히 죽어간다. 간혹 살아서 한 줄기 꽃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최적의 생육조건을 갖추어준다고 해도 상품으로 출하하기 위해 영양제를 잔뜩 먹고 나온 처음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서양란은 화병에 꽂은 꽃다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역할을 마쳤으니 다른 서양란을 사다가 화분에 심어야겠다. 


서양란에 비하여 장생란(석곡)은 애써 관리하지 않아도 잘 자라고 꽃도 잘 피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이지만 벌도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 베란다에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수정할 수 없다. 그저 베란다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의지할 수밖에... 간혹 붓으로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 발라 수정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나는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한다. 장생란은 품종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화원마다 이름을 붙여서인지 여러 종들이 있다. 잎의 모양, 꽃의 모양 등등 굳이 구분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나는 처음 입양할 때 붙어온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장생란이 있고 풍란과 춘란도 키우니 이놈들이 꽃을 동시에 피우면 자기와 같은 품종을 찾아서 수정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보통 5~6월경에 꽃을 피우고 이듬해에나 다시 꽃을 피우던 이놈은 올해 시도 때도 없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아니 원래 시도 때도 없이 꽃을 피우는데 환경이 좋지 않은 우리 집에서만 봄에 잠깐 꽃을 피웠는지도 모르겠다.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어떤 사람들은 란이 꽃을 피우는 이유를 죽기 직전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파리나 뿌리의 상태를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 해도 어쩔 것인가. 호접란처럼 죽을 상황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부창부수라더니 남편이 난과 이런저런 식물들을 키우니까 몇 년 전부터 아내는 다육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식물을 많이 키웠던 아버지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아버지보다 더 많은 식물을 키우고 있다. 여행을 가서도 자식에게 '밥 먹었냐'는 말보다 '화초에 물 줬냐?와 개 밥 줬냐?'부터 물어봤던 당신의 말에 섭섭해서 결혼하면서 한동안 식물을 멀리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서 하나 둘 키우기 시작한 식물들이 이제는 베란다를 채우고 있다. 


너무 관심을 쏟으면 왕성한 번식력을 보여주는 이놈들이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잡초도 아닌 것들이 왜 이리도 잘 자라는지 벌초라도 해야 할 판이다. 자기들이 알아서 살고 죽으니 물주고 분갈이해주는 일만 신경 쓰면 된다. 이마저도 제때 안 해서 죽이는 경우도 많다. 이놈들은 주인을 잘못 만났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 주인에 비해 이놈들은 주인을 배려하나 보다. 꽃을 피우고 자태를 변화시켜 즐거움을 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