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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화북평원을 지나며


장쑤(江蘇省), 안후이(安徽省), 산둥(山東省 ) 일대에 펼쳐진 화북평원(華北平原)을 고속철도를 타고 지난다. 중국문명의 젖줄 황하는 관중평원(關中平原)과 화북평원의 경계인 함곡관(函谷關)을 지나서 드넓은 황토지대를 이곳에 만들었다. 칭하이성(靑海省) 쿤륜(崑崙) 산맥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관중지방의 황토를 끌고 와서 화북의 평원에 퍼뜨린다. 협곡 지대인 함곡관을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흐르는 이 강은 생명의 강이자 문명의 강이다. 고대 이곳에서 터전을 일구던 화하족(華夏族)의 생명수였다. 한족의 뿌리인 화하족은 불어난 물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홍수를 막기 위한 치수사업을 통해 황화문명을 이루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황하 하류의 물줄기는 유동적이었다. 홍수가 나면 원래의 물줄기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강을 만들었다. 큰 홍수가 나면 산둥반도 남쪽으로 흐르던 강물은 북쪽으로 300 km 이상 옮겨 가기도 했다. 고대 황하가 어디로 흘렀는지 가늠하기 힘든 이유도 이 강이 천정천(天井川)이기 때문이다. 뤄양(洛陽)을 지나면서 강은 지표면보다 높은 지대로 흘렀다. 건기일 때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홍수가 나면 베이징에서 장강 이북까지 누런 물결이 뒤덮었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치수에 성공한 인물이 영웅으로 대우받은 이유도 황화의 물길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황하의 치수에 성공한 우() 임금이 요순(堯舜)을 뒤이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청나라 말까지 황하의 물길을 고정시키는 치수사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55년 함풍제 때 발생한 홍수는 황하의 둑을 터트리고 황토는 산둥의 저지대를 뒤 덮었다. 흙과 모래가 산과 언덕을 제외한 지역을 뒤덮으면서 산둥반도 남쪽으로 흐르던 물길도 바뀐다. 현재의 보하이만(渤海灣)으로 빠져 나가는 황하의 흐름은 이 때 무너진 둑을 복구하면서 생겼다. 황화와 다른 강이었던 북쪽의 지수이(濟水)와 합쳐지면서 범람한 황하가 만들어준 비옥한 퇴적층이 산둥 남쪽에 생긴다. 이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둑을 파괴하면서 다시 산둥반도 남쪽으로 물길을 만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지수이로 물길을 돌리는 제방을 쌓으면서 황하는 현재와 같은 경로로 흐르고 있다.


 


차창 밖으로 보는 평원은 황하가 중국인들에게 준 선물이다. 비록 홍수가 났을 때는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물 반, 황토 반인 이 강은 산둥을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다. 넓은 밭에 드문드문 나무들을 심었다. 넓은 땅의 이정표일 수도 있고, 뜨거운 빛을 가려주는 차양(遮陽)일 수도 있다. 옛날 우 임금은 이곳에 초목을 심어서 황톳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 풍경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일 수도 있다.



주대(周代)부터 한·당대(漢唐代)까지 정치의 중심은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이 위치한 관중평원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화북평원 지역의 살림이 나았다. 춘추전국시대 산둥(山東) 지역은 제()나라 땅이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후였던 환공(桓公)은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霸者)였다. 패자란 주()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힘을 갖춘 제후로 주 왕실이 공인한 자이다. 화북평원의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면 환공은 춘추시대의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환공은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활을 쏘았던 관중(管仲)을 기용할 정도로 정치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은 상인적인 기질을 활용하여 제나라의 국력을 키운 인물이다. 황하의 선물인 비옥한 땅과 동쪽의 바다에서 얻은 소금 등은 제나라를 살찌우는 바탕이었다. 자신이 모신 태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환공에서 화살을 날렸던 관중은 친구인 포숙(鮑叔)의 추천을 받아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제나라의 국력을 키워 환공의 은혜에 보답했다.


 

상하이를 출발하여 한참동안 평원을 달려온 열차는 좁은 바위 골짜기를 지나는 듯싶더니 터널로 들어간다. 산이 많은 우리 땅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에서 나타난 터널은 조금 낯설다. 스마트폰으로 바이두(百度) 지도를 보니 산둥성 성도인 지난(齊南) 남쪽의 지우루산(九如山)을 지나고 있다. 이 산 서쪽의 둥펑호(東平湖)는 수호전(水滸傳)의 산채인 양산박(梁山泊)로 가는 곳이었다. 수호전은 이름에서부터 물이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준다. 함곡관을 빠져 나와 뤄양에서 탁 트인 평원에 도달한 황하는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을 거쳐 둥펑호에서 지우루산의 한 줄기인 리우꽁산(六工山)과 부딪쳐 물길을 바꾼다. 현재 황하는 둥펑호 북쪽으로 흐르지만 남동쪽에도 물길이 남아있다. 속을 알 수 없는 황토 빛 물결에 이은 안개 낀 둥펑호, 리우공산에서 지우루산을 거쳐 타이산(泰山)으로 이어지는 험한 지형이야말로 양산박이 자리 잡기 좋은 곳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가 아닌 요산요수(要山要水)이다




수호전은 송나라 휘종의 폭정에 대항한 의적들의 이야기이다. 약간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명대에 가공한 이야기이다. 양산박의 두령 송강은 송사(宋史)에도 서술된 실존 인물이지만 수호전에서 묘사한 것처럼 의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배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역사는 난을 일으킨 도적으로 짧게 적기 때문이다. 송강과 양산박의 영웅들은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인물이다. 만약 신종(神宗) 대에 신법(新法)으로 알려진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정책이 성공했다면 수호전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했으리라. 중원을 종단하는 기차 안에서 오래전 읽었던 수호전을 떠올릴 줄이야. 터널을 빠져 나온 열차 밖에 도시의 풍광이 펼쳐진다산둥의 중심도시 지난(齊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