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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송(宋)의 문치주의와 사대부

10~11세기 북송과 요의 영역


우리는 송나라를 도덕적 수양과 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는 주자학의 나라로만 생각한다. 아마도 주자학을 학문의 모태로 삼은 조선의 성리학자들 때문일 것이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신분에 맞는 질서를 강조했던 나라이다. 이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조선 사대부들이 숭앙했던 송나라도 그랬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와 율곡은 물론 그 후계자들은 송나라의 사상과 문화 중 일부만을 수용하였다. 그렇지만 주자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송나라를 성리학의 나라로만 인식하였다.


주자 초상


 조선의 사대부들은 남송 시기 정립된 신유학인 주자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전용(專用)하였다. 그들은 주희의 사상만 수용하지 않았다. 주희의 모든 면을 닮으려 했다. 주희의 시를 따라한 퇴계와 율곡의 연작시도 이런 배경에서 출현했다. 문학적 기교보다는 창작자 자신의 사상과 유가적 수양을 강조하는 문학이다. 당시에는 문이재도(文以載道; 문학은 사상을 실어야 한다)’라 일컫는 창작론을 중시했다. 퇴계는 주희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모티브로 한 연작 한시 도산잡영(陶山雜詠)과 연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고, 율곡은 주희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모티브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을 정도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주자의 모든 면을 흠모하였다. 조선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이럴 정도였으니 그 제자들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송나라는 한족의 문화를 꽃피운 나라이자 주자학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장택단이 <청명상하도> 에서 묘사한 카이펑의 시장 모습


그런데 송은 엄격한 신분질서가 유지되고, 도학적(道學的) 분위기가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 대부(士大夫)가 송의 주요 권력층이었고, 수도인 카이펑(開封, 당시 이름은 비엔징(汴京))이 원래 상인 중심의 교역도시였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사대부는 당이 멸망하고 5 10국의 혼란기를 끝낸 송나라에서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특권을 인정받은 귀족과 달리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사대부는 사상과 학문의 수준을 고양시키고 예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전까지 학식이 뛰어나도 황제나 귀족들의 책사에 머물렀던 사대부들이었지만 송나라에서는 과거라는 공인과정을 거쳐 지배계급으로 등장한다. 수호전에서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나오는 채경(蔡京)의 사례로도 송 대 사대부의 실상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휘종(徽宗) 대에 재상을 지낸 실존인물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된 뒤 재상까지 오른 사대부였다. 북송의 멸망을 초래할 정도로 권력을 남용한 그가 사대부였다는 사실에서 전 시대와 달리 지배계급의 중심이 된 그들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


사대부가 송나라의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유 중 하나는 송 태조 조광윤의 이력과 무관치 않다. 후주의 장군(將軍)으로 황제에 오른 조광윤은 송나라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무장들의 힘을 통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의 멸망과 5 10국의 혼란은 절도사의 병권을 통제하지 못했고, 황제도 통제하지 못한 힘을 지닌 군벌(軍閥)의 난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후주(後周)의 무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주군인 공제에게 황위를 선양받았던 자신이 그 본보기였다. 그가 보기에 무장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이었다. 황제의 권력을 유지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무장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다. 그는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측근이었던 무장들의 군권부터 자진 반납하는 방식으로 빼앗는다. 황제가 된 이듬 해 개국공신이었던 무장들을 잔치에 불러서 잔뜩 취하게 한 후 병권을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이른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은 문신의 나라를 만드는 주춧돌이 된다.

 

황제가 직접 주관한 송대 과거 장면. 최고 득점자를 결정하기 위하여 황제에게 채점표를 올리는 모습.


무장을 필요악으로 인식한 송 태조는 문신이 무장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행한 것이다. 태조는 과거시험을 직접 주관하여 학문적 능력을 갖춘 사대부들을 관료로 선발하였고, 이들을 지방 관리로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했다. 절도사 등의 군벌 폐해를 인식했던 송 태조는 이전까지 대우를 받지 못했던 사대부를 검증된 절차인 과거로 등용하였고, 신하의 최고 직위인 재상도 과거를 통해 진사(進士)가 된 문신만이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송 태조는 문신을 우대하는 행동을 직접 보이며 무장에 대한 문신 통제를 확고히 했다. 경연(經筵) 참여도 그 중 하나이다. 경연은 황제와 신하들이 경전을 근거로 국정을 협의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황제가 문신을 우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학문 수준이 낮은 무장들은 경연에서 빛을 발할 수 없었다. 무공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타인을 설득할 정도로 학식이 높지 않았다. 송 태조는 학문적 소양을 갖춘 문신 사대부들이 무장들을 합리적으로 통제해야만 송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연에 참여한 명 황제 신종의 모습. 가운데 앉은 황제의 좌우에 문신들이 서있다. 문신들 뒤에 서있는 무관들의 모습을 통해 송명대 문치주의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송태조의 문신 우대는 금에 쫓겨 재건국한 남송에서도 이어질 정도로 송의 확고부동한 통치원칙이었다태조는 뜻이 맞지 않다고 하여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유훈을 남길 정도로 문치주의를 확고히 했다역대 북송의 황제들은 즉위하면서 석각유훈(石刻遺訓돌에 새긴 태조의 유훈)으로 알려진 송 태조의 유훈을 직접 보고 그 뜻을 이어갔다석각유훈은 금나라 군이 카이펑(開封)을 점령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통치원칙이었다송의 역대 황제들은 태조가 남긴 유훈을 마음에 각인하였고 남송이 망할 때까지 철저하게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