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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서

무덤들 사이로 멀리 선도산(仙桃山)을 볼 수 있다. 신선과 복숭아가 들어간 산 이름은 도가의 영향을 받았다. 신선과 신령은 같은 존재이다.


노서동 고분군(1)


노서동 고분군(2)


큰 산이 작은 산을 품고, 작은 산이 더 작은 산을 보듬었다. 산과 산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무와 풀이 의지한다.고대 서라벌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삶터에 산을 만들고 조상을 모셨다. 고인이 잠든 산의 등성이는 먼 발치로 보는 산의 등성이와 겹치며 신령한 산의 기운을 전했다. 산자는 삶터에서 조상의 묘를 통해 신성함을 간직한 자연과 연결되었다. 하늘에 닿아있는 먼 산은 신이 있는 곳, 가까운 산은 조상이 머무는 곳, 평지는 자신이 있는 곳. 경주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노서동 고분군(3)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이 지배층을 사로잡기 이전까지 고대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조상을 모셨다. 유가처럼 삼년의 상례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묘를 마을 근처에 만들었다. 망자의 무덤은 후손의 힘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효보다는 살아있는 자는 생전에 조상이 지녔던 힘이 현세를 살고 있는 자신들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가시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망자가 지녔던 지혜도 자신들에게 전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법흥왕릉


그런데 법흥왕 이후 산처럼 조성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사라진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 설화로 알려졌듯이 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공인한 인물이다. 그는 불교 공인뿐 아니라 중국의 정치제도를 수용하였고 한자식 명칭을 도입했단. 우리가 신라 고유의 무덤양식으로 알고있는 돌무지덧널무덤들은 법흥왕 이전까지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흥왕 이후 왕의 무덤과 중앙 귀족의 무덤은 중국식인 석실분 형태의 무덤을 따른다. 법흥왕릉, 무열왕릉이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전대의 무덤과 확실히 다르다.


태종무열왕릉


이제 무덤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벗어난 산자락에 만들어진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법흥왕릉이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릉 위치에 사찰과 봉우리가 등장한다. 법흥왕릉이 사찰 근처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불교가 신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증명한다. 이제 사람들은 부처와 보살들이 자신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는 숭배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무덤의 크기도 작아진다. 적어도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십이간지의 판석을 두른 무덤의 출현하기 전까지 왕의 무덤은 소박했다.

 

화랑을 가르치는 원광법사 모습을 재현한 등롱


지배권력은 경전을 근거를 두고 일관성 있는 진리를 설파하는 불교의 영향력을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부처의 말씀을 담은 경전에 대한 해설은 귀족 출신 승려들이 맡았다. 귀족 출신 승려들은 불교의 전파를 통해 왕의 힘을 신라 땅 곳곳에 전파하고자 했다. 게다가 개인의 깨달음보다 중생의 구제를 중시한 대승불교를 승계한 신라의 불교는 왕과 귀족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후대에 미화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신라 화랑도의 계율로 알려진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왕권 강화를 위한 신라 불교의 이데올로기이자 지침이었다.


원효대사 진영

 

적어도 원효대사가 정토종을 창시하기 전까지 피지배계급에게 부처나 무당은 같은 존재였다. 정토종는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불만으로도 죽은 후 서방정토(西方淨土)인즉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속세에서는 법장보살이었지만 48개 서원(誓願: 바라는 바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에게 맹세하고 실천하는 일)을 세우고 부처가 된 아미타불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피지배계급의 희망이었다. 귀족출신 승려였던 의상의 화엄종처럼 교리를 중시하지 않아도 되었다. 믿음을 갖고 염불을 외우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명쾌한 논리는 현세의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는 내세관이었다.



정토종의 출현은 육두품 출신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달은 원효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일신라 후기에 출현한 미륵불 신앙이 피지배계급의 구원의식을 반영한 것처럼 정토종도 사회적 모순의 결과물이다. 미륵불 신앙이 퍼지고, 길흉을 점치는 도참설이 결합된 풍수지리설까지 유행하면서 마을에서 산자락으로 옮겨졌던 무덤은 길지(吉地)라 불려지는 자리에 조성된다. 이제는 후손들의 영광을 위하여 무덤을 조성한다. 조상의 지혜를 같은 공간에서 공유하고자 했던 고대 신라인들과 달리 후손의 부귀를 위하여 조상이 활용된다. 조상의 생애는 부풀려지고 무덤 또한 화려해진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아직도 망자와 지속적으로 교감하는 방식의 묘제를 확정하지 못했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묘를 쓰고 모시든 납골당에 모시든, 가까운 곳에 못시든 먼 곳에 모시든 망자는 우리와 함께 한다. 망자는 망자의 위상이나 후손의 지위가 아닌 살아있는 자의 소중한 기억 속에 있다. 같은 시공간에서 살았을 때 서로를 향한 마음이 깊었다면 기억은 오래오래 지속된다.

 

경주의 왕릉 사이로 해가 질 때 떠오른 생각인데 말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