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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하며(우리 동네)

1984년 8월의 마지막 날

경향신문, 1984.9.3.


19848월의 마지막 날, 장대비가 쏟아졌다. 거센 비바람 때문에 우산은 쓰나마나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쫄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인 토요일 등굣길(주육일 근무제였던 당시는 학교도토요일 오전에 수업을 했다)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성내동과 방이동을 가르는 성내천의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거센 황톳물은 성내천의 흙벽을 무너뜨리며 한강으로 흘러갔다. 이때만 해도 비가 쉬지 않고 닷새 동안 퍼부을 줄 몰랐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만 해도 성내천 주위의 밭들은 물에 잠겼어도 나란히 있는 2차선 도로까지 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84년 한강대홍수 때 물에 잠긴 풍납동. 사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선은 풍납토성이다. 사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인다.


그러나 닷새 동안 중부지방에 내린 비로 한강의 모든 댐들이 수문을 열자 한강의 수위는 조절불능 상태에 빠졌다. 한강물이 불어나면서 범람 위기에 있던 성내천의 물은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빗물이 빠져나가야 하는 배수구에서 펌프처럼 물이 솟구쳤다. 낮은 지대였던 풍납동이 먼저 잠기더니 성내동도 물바다가 되었다. 주택은 물론 홍수 대책을 통제해야 하는 강동구청, 강동경찰서 등 관공서까지 침수되었다. 비교적 높은 곳에 있었던 우리 집도 1층까지 물이 찼다. 1층에 있던 세간들을 위층으로 급하게 옮겼지만 정작 집밖으로 가려면 가슴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며 나가야 했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에 비위가 상했지만 2층까지 잠긴 친구 집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야말로 최선의 수해대책은 비 그치고 물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수해로 학교도 휴교했다. 휴교를 하지 않았다고 도로가 물에 잠겨서 갈 수도 없었지만······.


올림픽공원을 건설하기 전, 방이동 몽촌토성 전경. 왼쪽 상단에 성내천이 보이며 다리 뒤쪽은 지금은 재건축한 미주아파트. 1985년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제 몽촌토성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집들도, 흙벽을 굽이굽이 휘돌며 흐르던 성내천도, 토성의 가장자리인 방이동 길을 따라 가락동으로 가던 광신교통의 30번 버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올림픽공원을 조성하기 전까지 성내천 주변의 밭에서는 채소를 재배했다. 당시 성내천은 굽이굽이 휘도는 모습이 멋진 곡류천이었다. 천오백 년 전 백제인들이 몽촌토성을 쌓았을 때는 해자 역할도 했으니 그때는 성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흘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길의 흐름도 변했고,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서서히 바뀌어 방이동 구간(올림픽공원 북쪽)은 곡류천으로 변했으리라 여겨진다.

 

1980년대 초반 방이동(현재 올림픽공원)과 둔촌주공아파트. 포플러 나무 뒤 쪽 도로가 강동대로이다.


학교를 오가던 버스에서 보면 수량이 적을 때는 침식된 땅 사이로 흐르던 구불구불한 물줄기가 보기 좋았다. 지금처럼 제방을 쌓지 않아서 가끔씩 하천과 맞닿아 있던 밭의 모서리가 1~2미터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르는 곳까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았던 셈이다. 적어도 이때만 해도 성내동과 방이동은 아파트 단지와 농토가 공존하고 있었다.


81년 방이동(현재 올림픽공원)에서 본 둔촌주공아파트. 고 김기찬 작가의 방이동 사람들의 삶과 공간을 담은 사진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84년 여름 막바지에 홍수가 나면서 성내천과 주변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더 이상 옛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수해를 복구하면서 이곳에 서울올림픽 경기를 치르기 위한 경기장들과 선수촌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81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경기장들과 선수촌 아파트를 건설 지역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83년 올림픽공원 건설을 위한 기본 설계가 확정되면서 경기장 시설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이듬해 발생한 홍수로 수해복구 과정은 올림픽공원 조성 공사와 병행되었다. 남한산성이 있는 성남 청량산에서 시작해서 거여동과 오금동을 지난 후, 올림픽공원 북쪽으로 흐르는 성내천의 옛 모습은 공원공사를 시작하면서 사라졌다. 수해 피해를 막기 위해 개천을 따라 둑을 쌓고, 배수펌프를 갖춘 유수지가 생겼다. 이전까지 성내천의 홍수대비 시설은 성내교 하류의 수문밖에 없었으니 이 유수지는 첨단 재해대비시설이었다.


생태적 환경을 강조한 조감도와 달리 현재 성내유수지생태공원은 체육시설이 더 많다.

 

그럼에도 1990년에도 84년에 이어서 성내동과 풍납동 대부분이 물에 잠겼으니 배수펌프장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수지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물웅덩이이다. 비가 많이 올 때는 유용한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물을 가두어 놓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강으로 가는 빗물이 머무는 곳이다 보니 습지가 만들어졌고 악취도 풍길 수밖에 없었다. 콘트리트 블록만 도드라진 유수지의 모습도 보기 좋지 않았다. 낙우송과 갈대 등을 심은 생태공원과 유수지를 복개한 자리에 체육시설이 2008년 들어섰다. 둔촌사거리에서 올림픽대교 남단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는 차들의 대부분은 성내동 유수지 위에 세워진 성내유수지교를 지나 올림픽대교나 잠실로 간다. 포플러 나무가 드문드문 있었던 왕복 2차선 도로는 10차선 도로가 되었다. 강동대로이다.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면서 대로란 이름이 붙은 도로가 그렇듯이 도로 폭이 넓다. 넓은 만큼 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성내천 둑길이 있어서 덜 삭막하다.


고 김기찬 작가가 필름에 담은 옛 방이동 길(현재 올림픽 파크텔 앞)

 

현재 성내천의 물줄기는 바로 한강으로 이어진다. 원래 이 하천은 오금동을 거쳐 몽촌토성을 끼고 지금은 석촌호수가 된 송파나루를 거쳐 한강으로 흘렀다.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면서 몽촌토성 남서쪽에 몽촌호를 만들었는데 몽촌호는 옛 성내천의 물줄기를 살렸다고 보아도 된다. 올림픽공원을 건설하기 전, 몽촌토성의 해자였던 몽촌호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밭으로 변해있었다. 방이동 사람들의 삶과 터전을 필름에 담았던 고 김기찬 선생님의 사진에는 몽촌토성 남쪽 언덕을 끼고 형성된 방이동 길이 보인다. 휘어진 신작로 길인 방이동 길 위로 오토바이가 잠실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올림픽공원 산책로로 바뀌었으니 길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올림픽공원과 주변 지역.


이제 자연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은 없다. ‘생태라는 이름은 인공을 갈음한 말일 뿐이다. 우리는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생태라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 위로한다. 이제 인위적인 자연에 익숙하다. 성내천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의 의식이 수십 년 동안 우리의 의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변화했는지 떠올릴 수 있다. 반듯반듯한 네모꼴 격자의 공간 배치가 근대화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다. 생태하천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성내천은 네모꼴 올림픽공원 구역에 갇힌 채 곡류천의 멋진 모습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자. 그래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새들이 지저귀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겨울이면 눈 쌓인 공원을 걸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