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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하며(우리 동네)

성내동의 다세대 주택

하늘에서 본 성내동 전경(2007)-네이버 지도에서 퍼옴.


서울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성내동에서도 사오층 다세대 주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원룸이나 투룸이라고 불리는 주택들이다. 주차장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건축법 때문에 대부분 1층은 기둥만 있는 필로티 구조로 지었다. 사십 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건물도 유행을 탄다. 한 지역에 비슷비슷한 건물이 세워지는 이유는 좁은 땅에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건축 관련 법규에서 허용하는 기준을 지키면서 세대 수를 늘리려다 보니 비슷비슷한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다. 최근 필로티 구조의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이유는 주차 문제 때문이다. 필로티 구조에 만든 주차장은 용적률 제한을 받지 않으며 층으로 계산하지 않아 층 수 제한에서 벗어난다. 주차장 설치를 의무화한 법을 지키면서 주거 전용 면적도 늘릴 수 있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주차문제를 해결하고, 건축주는 전용면적을 넓힐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필로티 구조의 다세대 주택이 증가하고 있는 성내동


다세대 주택의 증가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은데, 새로 지은 다세대 주택 주변의 기반 시설은 그대로이기에 과밀화 문제가 발생한다. 건물의 층수가 높아지면서 일조권 문제가 생기고, 건물과 건물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사생활 보호 문제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다세대 주택은 증가하고 있다. 서울의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주택 한 채에 한 세대만 사는 단독주택을 성내동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아니 원래부터 성내동에는 단독주택이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단독주택을 찾기 힘든 것이 최근 이루어지는 재건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강 이남의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성내동의 택지를 개발할 때부터 이곳에는 공동주택이 많았다. 단독주택 지역이었음에도 실제로는 다가구나 다세대 형태의 공동주택이 많았다(다가구 주택이란 여러 세대가 거주하지만 각 세대주는 임차인일 뿐이며 건물주만이 소유권 등기를 할 수 있는 주택이다. 이에 비하여 다세대 주택은 여러 세대가 거주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세대별 소유권 등기가 가능한 공동 소유의 주택을 말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네 집으로 등장한 미니이층 불란서주택


우리는 아파트, 빌라, 연립주택만을 공동주택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등장한 서울의 단독주택은 다가구 주택에 가까웠다. 단독주택으로 완공되었더라도 일층이나 반지하층을 임대하기 위해 구조를 변경했다.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한 정환네 집처럼 외부에서 보면 단독주택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두 세대 이상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이었다. 이런 집은 보일러나 다용도 공간이었던 반지하층을 빼면 일층 또는 이층집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공간을 생각한 탓인지, 아니면 집의 규모를 내세우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니를 붙여 미니 이층집, 미니 삼층집이라고 불렀다


구들을 이용한 우리의 전통온돌 난방 방식이다. 장작에서 연탄으로 연료가 바뀌었지만 1970년대까지 서울 주택의 주요 난방방식이었다.

3구형 연탄 보일러. 구멍 하나에 22공탄 연탄 3장을 사용했다.3구형 연탄보일러는 후일 등유보일러로 바뀌었지만 별도의 보일러실을 설치하고 온수를 분배 공급하는 방식은 동일했다.

미니 이층이 미니 삼층집으로 층수를 올리는 데는 난방 보일러 덕이 컸다. 배관파이프를 통해 바닥 난방을 할 수 있는 온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주택의 층수도 높아졌다. 예전 같이 직접 구들을 덥히는 난방 방식을 유지했다면 공동주택은 빠르게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탄에서 등유로, 다시 도시가스로 연료가 바뀌었어도 온수가 흐르는 배관파이프는 다층 주택의 난방을 해결했다. 게다가 보일러실이라고 사용승인을 받은 후, 주거공간으로 바꿔 임대도 했으니까 난방용 보일러는 다세대 주택 확산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일 다세대 주택이 증가하면서 약한 수압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했던 물 저장 시설 옥탑도 이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옥탑이 거주용 임대공간인 옥탑방이 되었듯이 다세대 주택 시설의 편법 전용은 서울의 주거 난을 이용한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이남의 단독주택지구로 개발된 강남구 도곡동에도 한가구만 주거하는 단독주택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도곡동도 다세대 주택 밀집지역으로 변했다.

 

이런 주택들이 등장한 이유는 주택 공급보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고, 비싼 대지에서 최대한 수익을 올리려는 집장사와 입주 후 임대수익을 바라는 집주인들의 욕망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용승인(1992년까지는 준공검사라고 했다)을 받고 등기를 할 때까지는 단독주택이었다. 등기 절차가 끝나면 거주공간이 아니었던 곳이 거주공간으로 바뀌었다. 원래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으나 주거용으로 고쳐서 임대했으니 처음부터 단독주택을 지을 생각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단독주택 지역이지만 단독주택을 눈뜨고 찾아봐도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은 성내동에 국한되지 않았다. 서울이 확장되면서 조성된 택지지구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주택과 주차난을 해소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에 걸쳐 다가구 주택 관련 법률의 규제 조항이 완화되면서 그나마 있던 단독주택도 사라지고 있다.


1980년대 건축한 이층 주택으로 일층에 임대용 가게가 있다(2019.1). 반지하 공간까지 주거용으로 용도 변경하여 하나의 주택에 네다섯 가구가 사는 다가구주택(2019.1). 성내동에서 이런 주택이 등장한 때는 1990년대 초반이다.


사십 년 전, 성내동의 주택은 대부분 이층집이었다. 일층에 가게를 둔 집이거나, 주거용 집이라도 주택 한 층을 임대할 수 있게 지은 집이 많았다. 반 지하 공간까지 있는 집은 주인이 거주하는 이층 외에 두 개 층을 전월세로 임대했다. 당시 우리 집도 일층에 가게가 세 개 있었는데 작은 방과 부엌이 있는 구조였다. 일층에는 부엌이 있는 단칸방도 있었으니 총 네 가구가 살 수 있는 구조였다. 형태로는 단독주택이었음에도 이층의 우리 가족까지 다섯 가구가 살았던 공동주택이었던 셈이다. 우리 집처럼 큰 도로에 가까운 곳은 근린시설 지구라서 가게를 갖춘 이층집들이 많았다. 주거용 주택은 큰 도로와 연결되는 이면 도로에 있었다. 어떤 곳에 있든, 어떤 주택 형태이든 성내동에 있는 대부분의 집들은 대부분 여러 세대가 사는 공동주택이었다.


그렇다고 성내동에 2층 건물만 있지는 않았다. 도로 폭이 넓은 길가에는 이보다 높은 건물들이 있었다. 대체로 4~5층 건물이 양재대로를 따라 나란히 들어섰다. 상업시설로 건축한 이 건물들은 가게들이 생기고 없어질 때마다 간판 등의 외관이 바뀌기는 했지만 건물의 형태는 지금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외부의 마감재를 교체했거나 내부 시설을 보수했어도 재건축한 건물은 거의 없다. 건축기술이 발전하고 용적률 완화로 새로운 고층빌딩이 세워지면서 강동대로나 양재대로의 스카이라인이 바뀌고 있지만 1980년대 건설했던 건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내동의 공동주택은 건축법이 개정되는 때와 맞물려 건축되었다. 용적률에서 필로티 공간을 제외하자 이런 형태의 건물들이 성내동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성내동의 변화는 큰 길에서 몇 구역 떨어진 주거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층집을 철거한 자리에는 삼사층의 공동주택들이 건축되었거나 세워지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삼사층(반지하층을 낀 삼층) 다가구 주택이 등장하더니, 2010년 이후로는 필로티 구조를 갖춘 사오층 다세대 주택들이 오래된 주택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섰다. 원룸 또는 투룸이라고 부르는 다세대 주택의 증가는 비단 성내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런데 건물의 층수가 높아졌어도 세대 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철거하기 전 다세대·다가구 주택에도 적지 않은 세대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세대 주택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서서히 인구증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택의 규모는 커졌는데도, 세대 수가 큰 폭으로 늘어나지 않으니 인구도 조금만 늘어나고 있다.


한국주거사의 중요한 양식인 불란서주택 모습. 1970~80년대 단독주택의 모델이었다. 길동에서 본 이 집은 차고와 창호를 제외하면 외관에서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2019.1)

 

성내동은 1970년대 말부터 격자형으로 개발된 곳이다. 성내2동은 옛길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새로운 택지를 조성하기 이전부터 하남과 광주로 이어지는 길(지금의 천호대로)과 가까워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고 길이 생겼던 곳이기 때문이다. 성내동 길들을 걷다 보면 사십여 년의 시차를 두고 세워진 다양한 형태의 주택을 볼 수 있다.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단독주택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런데 이웃 동네인 길동에서 1970년대부터 한국주택의 모델로 자리 잡았던 불란서주택을 보았다. 처음 완공했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차고를 신설하고 창호를 바꿨지만 원래 형태와 구조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다. 예전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집인데 이제는 다세대 주택에 포위된 채로 서 있었다. 이 집은 사십여 년동안 빠르게 갈아엎었던 이곳의 주택 재건축 역사에서 화석 같은 집이다.

서울 사람들의 주거형태를 알려주는 주거비율을 보면 서울에서 단독주택이 왜 적은지 알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의 아파트 주거비율은 42%이고, 다세대 주택 등 공동주택 주거비율은 42%이다(2017년 기준). 열 명 중 여덟아홉 명은 공동주택에 거주하며, 한 두 명만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셈이다. 전체 주거형태 중 10%를 조금 넘는 단독주택은 고급주택이거나 작은 주택들이다.


일제강점기 북촌의 모습. 조선시대 하나의 필지에 자리잡았던 사족의 저택이 여러 개의 필지로 나뉘면서 현재의 한옥촌이 형성되었다. 경성으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행랑채를 임대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1950년대 생긴 루핑집. 일제강점기 토막집에 유래를 두고 있지만, 오발탄의 루핑집은 토막집의 주거환경보다 더 열악했다.

 

그렇다고 이런 주택의 등장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일제강점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인구에 비하여 주택은 더디게 보급되었다. 운수좋은 날(현진건 작)의 김첨지가 세 들어 살던 행랑채도 예전에는 노비나 머슴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서울 사람들은 임대료 수입의 짭짤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태준은 복덕방」을 쓸 수 있었다. 그나마 단칸방이지만 발을 뻗고 자는 사람은 행복했다. 김동리의 혈거부족에 등장하는 토굴(土窟) 사람들은 비참하다. 비라도 많이 오면 굴이 무너지면서 자다가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주거난이 심해지면서 단칸방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이범선의 오발탄에 등장하는 루핑집은 토굴에 비하면 나은 곳이었다. 게다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서울로 갔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서울의 주택 보급률은 197078.2%였으나 1984년에는 66.6%로 낮아졌다. 서울에서 아파트가 아닌 다양한 형태의 공동주택이 나타난 이유이기도 하다.


단독주택 지구에 여러 가구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은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져서 새로운 택지를 조성하고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보다 공공개발보다 비용이 적게 들었다.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던 단독주택의 구조 변경을 조금씩 양성화하면서 다양한 공동주택이 등장했다. 이런 주택은 편법이지만 서울의 만성적인 주택난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다만 공공재인 기반 시설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인구 집중이 일어나면서 주거환경은 악화되었다.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던 1980년대 초반 성내동이 그랬다. 상수도의 수압이 낮아서 씻다 보면 수도꼭지는 자동제어시스템처럼 물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건축면적에서 필로티를 포함하지 않으면서 필로티형 다세대 주택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사십여 년 전에 비하면 성내동의 사회기반시설은 아주 양호하다. 수압이 약해서 단수가 되는 일이 없고, 도시가스의 공급이 끊어질 일이 없고, 전기의 전압이 약해 전등이 사이키(스트로보 라이트) 조명처럼 깜박이는 일도 없다. 주차지 등록제를 의무화하지 않는 한 영원히 해결될지 않을 것 같은 주차문제를 제외하면 주거여건은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신축 건물의 증가는 전월세 등의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졌다. 가파르게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성내동을 떠났다. 재건축한 새집은 주인을 빼고, 원래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입주하지 못했다. 이십 년 만에 돌아온 동네에서 부모님 세대의 이웃집 어른들을 본다. 집주인인 그분들은 재건축한 주택의 윗층에 산다. 그렇지만 세입자였던 분들은 대부분 성내동을 떠났다. 동네 친구들도 이곳을 떠났다. 아직 부모님들이 이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나처럼 성내동을 찾지만 삶터는 아니다. 최근 각종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개별 세대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첨단 보안장치를 설치한 다세대 주택의 등장이 좋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