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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신경림, 이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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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1호갱, 중국 시안(西安), 2005. 8.


이슬에 대하여
시안(西安)에 가서 도열해 서 있는 수천 기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다

신경림

도열해 서 있는 저 수천 기의 병마용은 만고의 폭군이 자기를 지키는 병사와 말까지도 권력과 영화를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죽였음을 말해준다. 그가 저 병사와 말 들을 시켜 짓밟고 불태운 마을은 얼마며 갈가리 찢고 죽인 백성은 또 얼마이랴. 그런데도 그가 죽인 저 병사들의 자손, 그 병마가 죽인 백성들의 자손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 그 만고의 폭군을 은근히 기린다. 그 덕에 이곳의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게 아니냐면서, 또 그 아니면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진 땅임이 어찌 알려졌겠느냐면서, 짓밟히고 불탄 마을과 들판에 널린 시신이야 한갓 옛날이야기일뿐, 그러니

어찌 탓할 수만 있으랴, 착한 이웃들이 그가 이룩한 작은 성과를 자못 자랑스러워하면서 우리의 작고 매운 독재자를 기리고 있다 한들, 도시와 공장과 고속도로에 밴 눈물과 피는 해가 뜨면 자국도 없이 스러지는 한갓 이슬같은 것인가.

신경림, 『낙타』, 창비, 2008.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중국 싼시성 성도인 시안의 동쪽에 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하게 발견된 이 거대한 유적은 진시황릉으로 알려진 가산(假山)의 동쪽에 있다. 사후의 진시황을 보위하기 위한 군대인 것으로 추정하는 병마용은 현재 1호갱 전부와 3호갱의 일부만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2호갱은 1976년 발굴 당시 그 실체만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한다. 보다 정밀한 발굴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성급하게 발굴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유물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호갱은 일부만 개방했는데 지휘부를 추정하게 하는 복색을 갖춘 용(俑; 흙으로 만든 인형)들과 전국시대의 전차(오늘날의 탱크에 해당하는 첨단 무기)와 이를 끄는 마용(馬俑)들이 진을 이루고 있다. 오늘도 이 거대한 문화재를 보기 위하여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심지어는 중국 정부의 공식 초정을 받은 국가원수들조차도 방중 일정에 병마용 관람을 넣을 정도이다. 이곳은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꼭 가보고 싶어하는 중국의 상징물이다.    
 
나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2005년 시안에 찾았을 때 제일 먼저 간 곳은 진시황릉과 병마용이었다. 오전에 진시황릉에서 그 규모에 놀랐던 나는 병마용의 실체를 접하고 그 규모와 생생함에 더욱 놀랐다. 이와 함께 병마용 일대에서 병마용 모형품을 파는 상인들에도 놀랐다. 병마용의 형태를 본따서 만든 기념품은 중국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치고 하나쯤은 사갖고 오는 인기있는 모형이다. 여름 성수기에는 비싸고, 겨울 비수기에는 매우 싼데, 시안 일대에는 이러한 병마용 기념품을 제작하는 작은 공장들이 아주 많다. 일반 사람들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크기의 인형부터 아주 작은 인형까지 현대판 병마용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복제된 병마용은 이제는 시안 이외의 장소에서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 보위병이 되었다. 한국에 있는 중국음식점 입구에 서있는 모조 병마용은 순장()된 병마용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물을 건너온 병마용들은 우리들 주변에서 고풍스러움의 키치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병마용 유적지의 병마용의 주인으로 알려진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있다. 역사에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한 최초의 황제이고, 법가에 의한 통치질서를 확립하고, 전국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소전체 문자표기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등등등. 이에 비해 진시황의 통치가 매우 폭압적인 형태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적게 언급되고 있다. 영화(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에서는 부활해야 하는 난세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정도이다. 부역에 동원된 장정들을 정해진 일시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잔인한 형벌로 죽였던 그는 오늘날 국가주의와 법치질서를 외치는 중국지도자들에 의해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되고 있다. 이와 함께 폭정의 산물인 진시황릉과 병마용, 만리장성 등의 문화재또한 중국의 위대한 문화재로 재정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하층계급에 대한 황제와 봉건세력의 착취는 은폐된다. 물론 봉건사회의 속성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만 이 문화재들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초래되는 필연성을 지나치게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승되어 오는 이러한 문화재들의 기원과 속성에 대하여 기억해야만 한다. 전통으로 명명되고 공인된 것들의 기원이 감추어지는 순간 역사는 찬란한 유산으로 치장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인류 문화의 산물에는 고통스런 인류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들 문화재의 이중적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들 문화재들이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왜곡되어 재현되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재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유형적인 문화재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내면화된 관념이다. 우리들의 현실로 시선을 돌려 보자. 28년간이나 한국사회를 통치했던 독재자의 폭력성이 사라지고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망각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의 피의 대가로 이룩된 것들은 간과된 채 그만의 공적인 양 치부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970년대 12~14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에서 만들어진 초과수익도, 용병으로 베트남민족해방전쟁에 팔려간 이들로부터 탈취한 생명수당도, 독재정권에 맞서 저항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양심수들도..... 모두 그가 이룬 치적 앞에 오늘날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문화재는 당대 권력의 관계 속에서 의미의 재정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문화재들은 지배자의 탁월한 영도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때로는 지배자 개인) 산물이기도 한 이 문화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피지배계급의 희생이 필연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극찬하고 있는 문화재들 대다수는 피지배계급의 피와 땀과 한의 결과물들이다. 이렇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발전도 한 독재자의 국가경영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은 올곧은 소신조차 밝힐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부모세대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침묵하게 했다. 오늘날 한국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기원에는 상존했던 국가폭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뛰어난 능력의 지닌 작고 매운 독재자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