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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북한산] 백운대행

겨울 설악산을 꼭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지 못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자면 무덤만 늘어날 것이다. 결국 방학이라는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3월에야 겨울산이 아닌 겨울산에 올랐다. 삼월의 북한산은 이틀 전에 내린 적지않은 눈때문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오늘도 날씨는 쾌청하지 않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산위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아이젠 한 쪽이 부러져서 친구에게 여벌을 갖고 오라고 부탁했다. 등산로 초입에서 구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른 아침부터 가게를 열 것같지 않다. 오늘같은 날씨에 아이젠 없이 백운대를 오른다는 것은 모험이다.

우이동 버스 정류소에서 친구를 만났다. 이십여분 늦게 나타난 나를 보고, 언제쯤 약속시간 지킬 것이냐고 타박한다. 농담삼아 지각도 나의 일관된 모습이라고 변명한다. 갑자기 너와 약속시간을 잘 지키기 시작하면 너무 놀랄까봐 바꾸지 않는다고.......

도선사까지 오르는 길은 지루하다.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는 길을 걷다 보면 건조한 느낌이다.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된 이 길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와 종교권력의 유착을 보여준다. 도로가 나기 이전에도 서울 지역의 큰 사찰이었던 도선사는 최고 권력자의 도움을 받아 엄청나게 교세를 불렸다. 특혜를 받은 대가로 3공화국과 유신독재의 호국도량(유신시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호국'이라는 단어가 인이 박힐 정도로 들어야 했다)이 되면서 특혜를 누렸다.

도선사 얘기는 그만 해야겠다. 얘기가 계속되면 권력과 밀착한 종교 문제들이 거론될테니까. 백운대 매표소에서 하루재로 가는 등산로를 택했다. 백운대로 가는 최단거리 등산로이다. 도선사를 거쳐 용암문, 백운대 경로를 이용했던 적은 있었도 이 길은 처음이다. 하루재 목넘이에는 북서면에서 날아온 눈이 쌓여 있다. 다져지지 않은 곳을 밟으면 무릎까지 빠진다. 하루재를넘어가면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려지게된 3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인수봉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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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서울 북한산,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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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사면(구름에 가린 인수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서울 북한산,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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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위문-백운대 구간), 서울 북한산, 2010. 3.


한국암벽등산의 성지 인수봉은 진회색 빛이다. 날이 풀려 밝은 회색빛 바위가 되면 꽃봉우리처럼 매달린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수봉 위로 비구름이 보인다. 백운대 위로도 비구름이 내려앉는 것을 보니 정상에 도착할 때쯤이면 비구름 속에 있을 것 같다. 북한산장까지 오르는 길이 약간 버겁다. 사진찍는다고 잠깐씩 쉬었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다리가 무겁다. 특히 계단이 연속으로 이어진 구간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팍팍하다.

북한산장에 도착해서 오늘 지각의 변(辯)이 된 커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과거 암벽쟁이들의 본부였던 산장은 등산인구가 늘면서 중소기업 규모의 매점이 되었다. 이곳에서 백운대까지는 지척이다. 위문에 도착하자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성벽을 측면에 끼고 오르는 길까지는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성벽이 끝나자 북한산 칼바람때문에 몸이 휘청거린다. 앞에 펼쳐진 만경대와 용암봉 능선을 사진에 담으려고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등을 바위에 기대고 비스듬한 자세로 올 겨울 북한산의 마지막 자태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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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와 용암봉, 서울 북한산, 2010. 3.


백운대를 오르다 보니 바위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서 냇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봄눈 녹듯이'란 말처럼....... 봉우리에 쌓여있는 눈때문에 백운대까지 오르는 길은 긴장감의 연속이다. 쇠기둥을 따라 연결된 쇠밧줄을 꼭 쥐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줄을 놓치면 황천길로 직행이다.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정상을 앞두고 바위를 돌아올라 가는 막바지 길은 마음까지 조바심을 내게 한다. 바람때문에 몸을 바위 표면에 붙여야만 발을 내딛을 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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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백운대 정상에 있는 태극기는 아랫쪽 끈이 끊어져 위태롭게 펄럭이고 있다. 백운대 정상에 둘러친 보호 철책을 잡고 섰지만,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몸을 앞으로 숙여 겨우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구름 위에 올라탄 느낌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빨리 하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고, 바람때문에 용암문 쪽으로 하산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보다 미끄러웠다. 쇠밧줄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인지 끼고 있던 장갑 표면의 가죽(아무래고 인조가죽같다)이 벗겨저서 너덜거렸다.

북한산장으로 내려와서 늦게 점심을 먹었다. 보온병에 담아온 물이 식어 컵라면이 빨리 익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고양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보다는 우리들의 양식을 노려보고 있다. 덤벼들지는 않지만, 그 눈매만은 먹이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비대하게 살찐 고양이들은 탁자 옆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먹이가 떨어지는 순간 환상적으로 도약한다. 앉아있을 때는 살찐 돼지처럼 보이더니....... 내 옆에 앉아 있던 이 놈은 먹이를 주지 않자, 슬며시 다른 등산객 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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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인수봉은 비구름에 가려 봉우리의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 삼각산 세 봉우리 위에는 봄눈이 또 쌓일 것이다. 쌓인 눈은 '봄눈 녹듯이' 녹을 것이고, 육중한 바위는 암회색 봄빛으로 채비하고 바위꾼들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