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 저런...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보면서 든 생각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불가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최고의 덕목은 모든 중생이 수행을 통해 자신은 물론 타인도 구원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미타불이든, 약사여래이든······.

 

그런데 조계종의 속승들은 중생의 염원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속만 챙기고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요인 중의 하나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이다. 사제만이 신과 접견할 수 있고 죄를 사할 수 있다는 '() 팔이'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독점적 지위 때문에 가능했다.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는 세속의 정치권력과 타협했지만 적어도 종교개혁은 교회와 사제만이 대리하던 신성의 영역을 혁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절밥을 먹고 승려가 된 비구들 중에는 자기들이 세상의 진리를 다 아는 척하는 자가 적지 않다. 어릴 때부터 '스님, 스님' 소리만 듣다가 머리를 깎았다고 수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법계를 받은 비구가 되면 인간세상의 애욕과 그로 인한 번뇌의 고통을 단절할 수 있을까? 기존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수행자가 그 힘든 수행의 길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어려웠던 시절 절은 여러 이유로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운 아이들을 거두었고, 그들 중에는 승려가 된 사람도 있다. 불가의 연기(緣起)로 보면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이고, 부처의 뜻을 펼친 것이다. 사바의 시각에서 보아도 멸생(滅生)이 아닌 공생(共生)을 추구하는 고귀한 행동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 중생의 업에 올라타서 진리의 빛을 가리는 자들이 있다. 출가란 속세의 인연을 끊고 진리를 위하여 용맹정진 하는 것인데, 조계종의 속승들은 출가(出家)를 가출(家出)도 아닌 외출(外出)이라 생각하는가 보다. 가출조차도 자기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결단을 동반하는데, 기존에 지은 집을 유지하면서 절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

 

혹시 그들의 희망은 출퇴근하는 일본 대처승이 아닐까. 불가의 수행자는 비구, 비구니에 국한되지 않는다. 승려는 중생의 수행을 돕는 안내자이자, 보조자이다. 중생은 세속의 업을 끊지 못하는 자신보다 수행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승려를 따른다. 처음부터 부처의 선택을 받은 비구가 없듯이 그들은 선승(選僧)도 아니고, 중생이 위에 군림하는 선민(選民)이 아니다.

 

전국비구.비구니 대회(1954.12)에 참석한 스님들이 조계사 인근에서 정화의 필요성을 외치며 행진하는 모습. 불교개혁을 주장한 봉암사 결사는 이후 전개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되었다.

조계종은 해방 이후 대처승들을 친일 잔재라며 절에서 몰아내는 정화운동을 통해 청정도량을 추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조계종을 청정하고 순정한 곳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중이 자기 머리를 깍지 못한다는 속담은 자신들의 부정을 스스로 뒤엎지 못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이제 조계종은 총무원장과 그 밑의 딸랑이들 바꾼다고 개혁할 수 없다. 개혁이란 단어는 동물의 가죽을 바꿀 정도의 고통스러운 행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금처럼 사바의 인연을 버리지 않고 사판의 지위를 누리고 싶다면 일본처럼 장례 때마다 불려가서 목탁, , 염불을 한 세트로 연기하는 직업승려가 되는 것이 낫겠다. 적어도 일본인들은 그들이 돈 받고 염불한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3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