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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김용택, 섬진강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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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강원도 삼척, 1997.10.


섬진강 20 감 傳

김용택

감들이 불쌍했다.
아버님은 초가을부터
행여나 행여나 하시며
거간꾼들을 기다리다
감들이 다 익어가도
팔릴 기미가 없자
큰놈만 대충대충 골라 따도
감은 끝이 없고,
첫서리가 내리고
감들이 사정없이 물러지기 시작하자
밤 터는 긴 장대로
감나무를 두들겨패댔다.
장대를 힘껏힘껏 휘두를 때마다
감들은 후드득 떨어져
박살이 나고 으깨어졌다.
아버님은
이 웬수놈의 감
이 웬수놈의 감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
이 썩을 놈의 감, 하시며
있는 힘을 다하여 두들겼다.
감가지가 찢어지고
감들이 떨어져 물개똥같이 되면
어머님은
이 아깐 것,
이 아깐 것, 하시며
그래도 성한 놈은 광주리에
가득가득 담으셨다.
그러시는 어머님을 보고 아버님은
버럭버럭 화를 내셨지만
어머님은 떨어지는 감을 맞으며
감쪼가리라도 만드신다며
정신없이 감을 주워담아
집에 갈 때
강변 바위 위에 벌겋게 널었다.

텔레비에선
감과 농촌풍경을 비춰주며
가을정취를 한껏 돋웠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님은
끙끙 앓으시며
저런 오살헐 놈들
감 땜시 사람 환장허는지 모르고
저 지랄들 한다고
텔레비를 꺼버리곤 하셨다.

흥정이 안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두 동도 넘는 감을 밭떼기로
4만원도 비싸다며
팔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감장수들 말에
아버님은 저녁땐 팔고
이튿날 아침이면
혼자 화를 내시며
감을 썩였으면 썩였지
팔지 않겠다고
앞산 벌건 감을 보시며
빈 지게를 짊어졌다
벗었다 하시며
어쩔 줄을 몰라 하시곤 했다.

초가을 감들은 온 밭을
붉게 물들였었다.
올 같은 가뭄에도 어찌나 감이 열렸던지
감가지가 찢어져라 휘어지면
아버님은 일 나가시며
작대기를 만들어
감가지를 받쳐주곤 하셨다.
앞산 감밭은 아버님께서 고욤씨를 뿌려
해마다 몇 그루씩 접을 붙여
애지중지 가꿔
넓은 밭 가엔 온통 감나무였다.
아버님은 이따금 익어가는 감을 보시며
"보소, 인자 저근 감나무골이네" 하시며
동네 어른들께
자랑을 하시곤 하였다.
가을엔 감빛이 앞강물을
붉게 물들이고
안개 걷히는 아침, 감들은
아름다웠었다.
어머님이 밭일을 하시다 잘못하여
어린 감나무 순을 하나만 다쳐도
아버님은 몇날 며칠이고
화를 내시며
어머님을 나무라시면
어머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좋은 놈을 골라
밤을 새워 감을 깎아도
감은 감이 아니라 걱정으로 쌓였다.
강변 바위들이 벌겋게 감쪼가리들이 널리고
빨랫줄이나 빈터 뽕나무 감나무에는
감 껍질들이 붉게 널려 말랐다.
두엄자리에는 감들이 썩어나고
돼지도 감을 먹지 않았다.
어머님은 앞산 감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하시며
밤을 새워 감을 깎고
아버님은 새벽 내내
곶감을 꼬챙이에 꿰어 달았다.

감들이 불쌍했다.
감나무 밑은 벌겋게 감들이 널리고
아이들은 감을 가지고
팔매질이나
강변에서 야구를 했다.
감이 몸둥이에 맞아 안타가 될 때마다
감은 박살이 났다.
아이들은 홈런을 외치고
아버님은 어둑거려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감을 져날랐다.
감들은 여기저기서
찢어진 감가지에 매달린 채
쭈그러들고 까마귀밥이 되고 물러빠지며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
감들이,
감들이 불쌍했다.

김용택,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올해 가을은 풍성하다. 올해는 태풍 한 번 없어서인지 다른 해에 비해 오곡백과가 풍년이다. 그런데 정작 일년농사의 결실을 품에 안는 농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본격적인 김장철인데도 배추값이 추락하고 있을 정도로 한 해 농사의 끝물이 좋지 않다. 배추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확물들이 값이 폭락해서, 풍년이 슬픔의 역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최근 정부는 배추값 폭락을 막기 위해 배추 10만톤을 폐기한다고 발표햇다. 수요와 공급의 고전적인 원칙 아래 공급과잉을 막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이 조치로 일년동안 정성들여 가꾼 배추는 자신을 키워준 땅에서 뿌리채 갈아 엎혀져 파묻힐 것이다. 이렇게 갈아 엎을 것이면, 뭐하러 씨뿌리고 거름주며 키웠는지 알 수가 없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야 농산물값이 내려갈수록 기뻐하지만, 정작 일년 노동의 수확물을 거두어들인 농민의 가슴은 썩어 간다. 이를 두고 어떤 경제학자는 농민들이 과잉생산했기 때문이라고 속편하게 말하지만, 농산물이 화학물의 합성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닌 이상 과잉생산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운운하기 전에 사람의 심리상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치고 힘닿는 한 조금이라도 더 얻고자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도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더 벌고 싶듯이, 농사꾼의 마음도 같은 마음인 것이다. 이를 과잉생산 운운한다면 철저하게 계획경제시스템으로 생산을 통제하거나, 과거처럼 자급자족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잉생산의 구조는 어떤 해는 가격 폭락을 초래하고, 반대로 어떤 해는 가격 폭등을 초래한다.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농사일의 특성 상 결실의 다소를 예측하는 것도 힘들지만, 적정가격의 책정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섬진강의 시인'으로 불려지는 시인의 '섬진강' 연작 중 '감전'은 감풍년을 맞았으나 기뻐하지도 못하는 어버이의 애환을 회상하고 있다. 고욤씨를 뿌려 해마다 몇 그루씩 감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등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키운 감나무에는 많은 감이 열렸다. 지금이야 편리하게 묘목을 사다 심기도 하지만, 예전 감나무를 키우는 대부분의 방법은 시에 등장하는 것처럼 했다. 오랜 노력 끝에 집마당, 밭의 어귀, 산자락의 감나무에는 가지가 처질 정도로 많은 감이 열렸고, 감은 농가의 적지 않은 부수입이 되었다. 그러나 감풍년이 되면 상인들은 감값을 후려치려고 했다. 적정한 가격을 받을 수 없어 따지 않은 감은 익어가면서 떨어졌다. '감전'에서 어머니는 떨어진 감도 버릴 수 없어 감쪼가리(감또개라고도 한다)를 만들었다. 요즘은 감쪼가리를 술안주로 먹는다고도 하는데, 감쪼가리는 곶감으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깨진 감부스러기조차 버릴 수 없었던 농민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성한 감은 홍시, 연시, 곶감 등의 여러 용도로 가공을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떨어져서 깨진 감은 상품으로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장에서도 그랬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있는 감나무에서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감이 익으면 일부는 장대로 가지를 꺽어서 땄고, 일부는 서리맞아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는 감나무 가지가 약하다고 감나무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낮은 곳의 감은 대나무 장대의 끝에 틈을 내고 감나무 가지에 끼워서 땄다. 이렇게 딴 감을 익히기 위해서 집집마다 여러 방법으로 저장했다. 오지 항아리에 넣어서 감을 서서히 익히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군것질 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라 카바이트를 넣어 빨리 익히기도 했다. 항아리에도 못 넣을 정도로 감이 많이 열린 계절에는 라면상자에 넣은 채로 익히기도 했다. 내가 살았던 곳에는 단감보다는 땡감이 많았다. 단감은 그냥 먹을 수 있었지만, 땡감은 삭혀아만 먹을 수 있었다. 감 중에서도 대봉감(표준어는 '장동감'이다.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뾰족감'이라고 불렀다)은 서서히 익혀 홍시로 먹었다. 집집마다 넘치던 감은 겨울을 나는 요긴한 영양식이었다. 집집마다 키운 감나무는 자연산 간식제조기였던 셈이다. 감나무는 주인이 정성을 쏟은 만큼 가을에 감으로 보답했다.

이처럼 정성들여 얻은 수확물은 자신의 분신이다. 그러나 이를 수매하려는 상인들에게 감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감전'에서도 아버지는 밭떼기 상인들에게 자신의 정성이 담긴 감을 헐값으로 넘겨주지 않는다. 상인들은 감풍년이라 더 이상 가격을 올리지 않고 배짱으로 나왔고, 감농사를 지은 아버지는 속이 타들어갔다. 이제 감은 보은의 선물이 아니라, 원수가 되었다. 감나무마다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달린 감을 보고 도시인들은 가을의 풍성함을 노래하지만, 정작 감농사를 지은 농사꾼에게 감은 또 다른 노역을 시키고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속도 모른 채 지천에 널린 감으로 야구를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성한 감을 해가 질 때까지 지게로 날랐고, 어머니는 성하지 못한 감을 감쪼가리라도 만들기 위해 강변의 바위에 널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자신이 씨를 뿌려 키우고 거둔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농산품이 아니라 자신의 땀과 노력이 스며든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농사일이 농업이란 산업으로 분류되고 수익을 내야 하는 산업으로 전락하면서 농산물은 이익과 손해에 따라 출하 또는 폐기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과다한 화학비료와 농약을 주는 것은 예사가 되었다. 정성들여 키운 농산물조차도 이런 농산품 앞에서 평가절하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감전'에서 고욤씨를 뿌려 감나무를 키우고, 떨어진 감도 아까워 감쪼가리라도 만드는 어머님의 마음을 간직한 농사꾼들은 아직도 있다. 이들은 오늘도 대규모 농업만이 살 길이라는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고상한 말씀을 비웃고 유기농을 근간으로 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 이들을 우리 농업의 미래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참혹하지만, 그래도 이들만큼은 정성들여 농사를 짓고 있다. 이들의 농사는 '감전'의 어버이와 같은 정성이 있다.  

해마다 10여년 전 가르쳤던 제자의 부모님께서 단감을 보내주신다. 몇년 전부터는 구례에서 정성들여 수확한 대봉감도 한 상자씩 받고 있다. 양가의 어르신들과 처와 아이는 감을 좋아한다. 아이는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대봉이 홍시가 되자 마자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정작 나는 어린 시절 미처 익지도 않은 땡감을 먹은 죄로 감에 물려 입도 대지 않지만, 그들이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서 정성을 보내준 분들의 마음에 감사한다.